유년 일기
고등학교 여름방학 어느 날, 도넛이 먹고 싶다는 친구를 따라 던킨도너츠에 들어갔다. 도넛 몇 개를 고르고 음료를 골라서 앉았다. 단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나는 아마도 어떤 도넛 하나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켰던 것 같다. 자리에 앉아서 음료 한 입을 막 마시려는 참에 친구가 묘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근데, 넌 그게 진짜 맛있어서 시킨 거야?”
친구의 묘한 톤에 짐짓 당황한 나는 변명하듯이 말했다. 그냥 단 거 안좋아해서… 쓰긴 한데 도넛이랑 먹으면 괜찮아라며 무슨 잘못한 일을 수습하듯이 말했다. 살짝 올라간 눈썹과 찡그린 미간 그리고 목소리 톤을 보니 정말 맛이 궁금해서 한 질문은 아닌 것 같았다. 그간 친구가 나에게 했던 이야기들로 짐작컨데 어른스러운 척하는 것 아니냐는 물음이었을 것이다.
당시 막 고등학교에 올라간 친구에게 쓴 커피를 마시는 일은 어른스러운 것이고, 동시에 ‘어른스러운 것’이란 ‘멋있는 것’과 동의어였을지도 모른다. 아니 애초에 어른스러운게 뭘까. 친구는 왜 나를 어른스러운 척한다고 생각했을까.
돌아보면 친구는 내 앞에서 자주 울었다. 수련회를 가서는 엄마가 보고 싶다며 눈물을 터트렸고, 어느 날은 좋아하는 같은 반 남자애가 다른 친구에게 관심이 있는 것 같다며 울었다. 반면에 나는 크게 기쁜 것도 슬픈 것도 없었다. 동시에 너무 좋은 것도 너무 싫은 것도 없었다. 아무도 나에게 신경쓰지 않고 혼자 있는 것이 익숙하다 못해 오히려 편안했다. 누군가가 보고 싶거나 관심이 필요해서 운다는 것 자체가 아득히 멀게 느껴졌다. 친구는 그럴 때마다 무덤덤한 내가 얄밉다고 했다.
당시에는 어른스럽다는 게 자신의 감정을 숨길 줄 아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나는 예나 지금이나 어른스러운 편이다. 근데 생각할 수록 감정을 숨기는 게 어른스럽다는 건 뭔가 이상했다. 이제와 곰곰히 생각해보니 어른스럽다는 건 혼자 있어도 진짜 괜찮은 사람이 되는 게 아닐까 싶다.
‘어른스러운 척’을 한다고 오해받은 그 날은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억울해서 목구멍으로 올라오는 울음덩어리를 몇 번을 삼켰다. 당시 내가 감정을 숨기고 뭐든 괜찮아 한 건 의도한 어떤 ‘척’이 아니고, ‘그래야만 하는 일’이었으니까. 그래서 그건 그깟 쓴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일 따위와 비교할 수 없다고 생각했었다.
서른이 훌쩍 넘은 요즘에도 그 친구와 커피를 마신다. 나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친구도 이제는 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신다. 지금은 그 날 일이 오해가 아니라는 걸 안다. 당시도 지금도 나는 혼자서 괜찮지 않았고, 그래서 정말로 더 괜찮은 척을 했다. 사실 친구가 맞았다. 나는 정말 열심히 ‘어른스러운 척’을 했다. 아마도 친구는 내가 멋있는 척을 해서 얄미웠던 게 아니라 내가 마음을 터놓길 바라는 서운함 때문임을 안다. 지금은 둘 다 어른스럽다는 말이 무색한 어른이지만, 아직도 그렇게 서로에게 어른스러운 척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