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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통 Sep 27. 2023

수국의 의미는 예쁜게 아냐

일상 관찰

 목요일 오후 세 시 반. 몇 달 전이라면 쉬지 않고 울리는 메신저 눈치를 봐가며 커피를 테이크아웃할 시간. 하지만 오늘은 다르다. 오늘은 해방촌 작은 카페에서 노트북을 열고 멍을 때린다. 공간은 협소하지만 가파른 계단을 올라와서인지 카페 앞 삼거리가 훤히 내려다보인다.


 익숙하던 테헤란로랑은 사뭇 다른 풍경을 한참 바라본다. 버스 정류장 앞으로 작은 마을버스가 지나가고, 정류장 뒤 길가에는 화분을 여러 개 늘어놓고 팔고 계신 할머니 사장님이 서 계신다. 그 뒤로 서로 다 알고 계신 듯한 어르신들 여럿이 앉아 수다를 떨고 있다. 정겨운 풍경이네. 그때 하늘색 크롭티에 흰색 카고바지를 입은 세상 힙한 젊은이가 그 옆을 지나가다 멈추어 선다. 뭐지. 아 맞다. 여기 해방촌이었지.


 젊은 친구가 서서 보고 있는 건 길가에 세워둔 활짝 핀 수국 화분. 잠시 멈춰 서는 것 같더니 이제는 아예 화분 앞에 쪼그려 앉아 이리저리 살핀다. 그 친구 방에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빨간 다라이 색 화분. 내가 다 인테리어 걱정이 되던 참에 할머니 사장님이 걸어오신다. 쪼그려 앉은 젊은 친구가 뭔가 질문을 하자 사장님도 옆에 같이 쪼그려 앉아 한참 이야기를 나눈다. 그리고 나서도 한참을 화분 옆에 앉아 고르는 눈치다.  대충보고 쿨하게 사 갈 것 같았는데 젊은 친구가 야무지다.


 그러다 사장님이 말없이 화분을 번쩍 들더니, 위쪽으로 옮겨 가신다. 시크함이 묻어나는 몸짓에 사지도 않을 건데 귀찮게 한다고 한 소리 듣는 건 아닌지 노파심이 들던 찰나. 사장님이 이내 어디서 배양토 한 봉지랑 화분 하나를 휘척휘척 들고 오신다. 조금 더 큰 하얀색 플라스틱 화분에 망설임 없이 수국을 쑥 뽑아 넣는다. 아 역시 빨간 다라이 색깔 화분이 문제였나. 저쪽에서 뻘쭘하게 서 있던 힙스터 친구가 다시 쪼르르 사장님 옆으로 와서 쪼그려 앉는다.


 사장님은 가지고 온 배양토를 흰색 화분에 더 채워 넣으시고는 손으로 꾹꾹 눌러 흙을 다진다. 옆에 있던 젊은 친구도 머쓱해하면서도 한 손으로 흙을 같이 다지기 시작한다. 몇 마디 더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더니 사장님은 몇 번을 더 배양토를 붓고, 눌러 담으셨다. 마지막으로 화분을 들고 일어나시길래 아 이제 끝인가 하는데. 다시 한번 내려놓고는 배양토를 조금 더 부어 넣고 줄기 주변을 한 번 더 꾸욱꾸욱 눌러 놓는다. 아마도 들었을 때 잔뜩 핀 수국에 비해 약해 보이던 줄기가 좀 흔들렸나 보다. 망설임 없는 손길이 무심한 것 같지만, 몇 번이고 흙을 옮겨 담고, 대충이 없는 야무지게 눌러 담는 수고는 분명 애정이었다.


 그러네. 사장님은 저 친구랑 내가 가고 나서도 여기 남아 계시겠구나. 저녁이 되면 어딘가로 화분을 옮겨놓고 물을 주고, 아침이면 다시 여기로 내어놓으시겠구나. 매일 살뜰하게 키워 살피지 않으면 식물들이 저렇게 살아있을 수 없지. 사장님에게는 화분 하나하나가 다 시들면 가슴 아플 자식 같겠구나. 그런 마음으로 화분을 보내고 계실지도 모르겠다.


 흰 비닐봉지에 담긴 화분이 드디어 젊은 친구 손으로 넘겨진다. 넘겨받은 손은 수국 꽃송이가 눌리지 않을까 걱정스러운 듯 봉지 손잡이를 여러 번 펼쳤다 다시 잡는다. 그리곤 꾸벅 인사를 하고 어딘가로 걸어간다. 두 사람 다 수국에 진심이다. 어느새 다섯 시, 카페가 닫을 시간. 장식으로 펴둔 노트북을 접고 역으로 걸어간다. 한참을 걸어 내려가고 있는데 건너편 버스정류장에 익숙한 화분이 보인다. 아까 그 친구랑 그 수국이다. 버스 시간이 한참 남았는지 비닐봉지에서 화분을 꺼내놓고 사진 각을 재보는 것 같다. 아마도 오늘 그 친구의 인스타에 올라갈 사진이겠지.


 사장님이 정성 들여 피워 낸 수국은 그 친구에게 집 가는 내내 미소를 가져다줄 것 같았다. 그런 화분을 파는 일. 그간 내가 그것보다 더 나은 일을 한 적이 있을까. 사람에게서 몇 단계는 더 멀어진 채 컴퓨터와 씨름하는 일. 몇 시간, 길게는 몇 달이 걸려 가상의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일. 그렇게 내가 만들어 낸 가상의 무언가는 누군가에게 그런 미소를 짓게 만들어 주지는 못했을 것 같다.


 일하는 동안엔 더 자주 그런 생각에 사로잡혔다. 내가 열과 성을 다해 만들어 낸 무언가가 어디서 쓰일지 예측하기 어려운 세상이다. 그리고 그 무언가는 점점 더 복잡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형태가 되어간다. 과연 내가 밤새 만들어 낸 그 코드들은 누군가에게 가서 닿기는 했을까. 수정하고 수정하면 실제로 누군가는 조금은 더 나아진 것 같다고 느끼기는 하는 걸까 하고. 정답은 없었다. 밤늦게까지 컴퓨터와 씨름하다 퇴근하는 길은 유난히 더 허무해지곤 했다. 이렇게까지 하는 게 다 무슨 의미가 있나 하고.


 근데 오늘은 조금 다른 생각이 든다. 일 자체가 의미 있는 일인지 아닌지가 문제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정성 들여 꽃을 키우고, 꽃들이 팔려 가서도 잘 자라길 바라는 마음으로 몇 번이고 같은 일을 반복하는 수고를 본다. 활짝 핀 수국이 의미가 아니라 진심을 다하는 마음이 서로에게 의미를 만들어 낸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화분을 사 간 젊은 친구도 진심으로 화분을 고르고 애지중지 들고 가는 그 마음으로 자신도 모른 채로 삶의 의미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매사에 툭툭 대충대충인 나만 몰랐다. 의미가 없는 일을 하는 게 아니라 내가 의미를 놓치고 있었다는 걸. 무엇이든 아끼고 진심으로 대하는 건, 누굴 위해서가 아니라 나에게 의미를 만드는 일이었다. 일이 어렵고 복잡하고 예측하기 어려워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렇다는 핑계로 내가 진심으로 봐주지 않아서였다. 실제로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고, 어떤 좋은 평가를 받아도, 내가 진심을 다하지 않았으니 결국 나에게는 의미가 없는 게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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