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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통 Sep 27. 2023

해방촌 책장 속 솔직함

책방 일기

 퇴사를 한다고 했을 때, 귀에 박히게 들었던 말은 퇴사하면 뭐할거냐는 질문이다. 매번 나는 다짐하듯이 적어도 3개월 동안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쉬겠다고 대답했다. 정말 아무것도 안하고 누워만 있겠다는 말은 아니었다. 하기 싫은데 해야만 하는 일 대신 ‘하고 싶은데 하지 못했던 일’을 하며 지내겠다는 말이었다. 읽지 못하고 책장에 쌓여있는 책을 먹어치우듯이 원없이 읽었고, 몇 년만에 일기를 다시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항상 바라만 보던 최애 서점의 일일 책방지기를 신청했다. 


 내향인 백수에겐 집 밖에 나가는 일은 이벤트다. 오랜만에 장장 다섯 시간 넘게 집이 아닌 곳에 있어야 하는 날이다. 그 동안은 대체 어떻게 열시간씩 회사에서 일하며 지냈는지 알 수가 없다. 어쩌면 그래서 그렇게 맨날 절전모드로 영혼을 차단시키켜 두었었나 보다. 책방 오픈시간은 오후 두 시. 먼저 도착해 공간을 오롯이 즐기려고 조금 서둘러 나선다. 버스를 타고 해방촌으로 향했다. 텅 빈 버스. 다른 공기. 다른 사람들. 직장인 신분을 벗어났다는 게 이제야 조금 실감이 난다. 


 평일의 해방촌은 조용하다. 문을 따고 들어온 책방은 더 고요했다. 숨막히는 정적이 아닌 기분 좋은 적막이 흐르는 공간. 조용히 앉아 잔잔한 음악을 틀고, 오랜만에 효용있는 일을 할 준비를 한다. 일일 책방지기로서의 업무를 확인하고, 구석구석을 둘러본다. 아직 오픈시간까지는 제법 여유 있다. 공간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책장을 둘러본다. 교보문고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립출판물과 독립잡지들이 눈길을 끈다. 


 그런 책들 속에 둘러싸여 이 책 저 책을 들춰본다. 몇 권은 한참 머물러 읽기도 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갑자기 이 공간 안에 앉아있다는 사실에 기쁨인지 설레임인지 모를 묘한 감정이 들었다. 이 감정이 뭘까. 독립출판물은 특유의 매력이 있다. 나에게 독립출판의 매력은 ‘날것의 솔직함’이다. 많이 팔리기를 기대하거나 누군가가 필요할 수 있어서 쓰는 글이 아닌 내가 만들어야만 하고, 만들고 싶은 걸 해내는 본능에 가까운 창작욕이 좋다. 그렇게 솔직한 이야기를 눌러 담은 책들이 책방 안에 가득 차 있다. 


 나는 솔직하지도 못한 주제에 솔직한 사람을 좋아한다. 그리고선 그 솔직함에 당혹스러워 하고, 상처받는다. 좋아하지만 불편한 동경. 그런데 오늘 이 공간 안의 솔직함은 편안하다. 낯선이의 가장 내밀하고 솔직한 이야기가 가득 담겨있는데도 말이다. 어떤 책은 펼처보면 문장마다 눈물을 참고 있어 내가 달려가 안아주고 싶다. 


 그렇게 누군가가 한 단어, 한 문장을 고심해서 적어낸 책들이 이 책장에 꽂힌 채 묵묵하게 내가 읽어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나를 찾아와 이야기와 감정을 쏟아내는 것이 아니라 책 한 권을 들어 펼쳐내면 내지 안에 정적인 글자로 나를 바라본다. 이런 방식이라면 솔직하지 못한 나도  조금은 솔직해 질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다. 몇 권의 책을 펼쳐보고 나니, 무거운 이야기를 들었는데도 괜히 가슴이 시원해진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익명의 그들과 잔뜩 깊은 수다를 떨고 난 기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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