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보통 Dec 02. 2023

지금 자신을 표현하는 글을 쓴다면

상담 일지

심리상담을 받게 되면 채워야 하는 질문지 중 ‘문장완성검사’라는 검사가 있다. 여러 문장에 비어 있는 밑줄을 채워 완성하는 검사다.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어른은 —— 이다.' 같은 문장들을 한 스무 개쯤 채우는 검사다. 다른 문장은 몰라도 위 문장은 보자마자 고민 없이 ‘여유 있는 사람’이라고 빈칸을 채웠다. 


어릴 적부터 내가 꿈꾸던 멋진 어른은 ‘여유 있는’ 사람이었다. 내면에 단단한 중심이 잡혀있어 엔간한 일에는 흔들리지도 않고 허허하고 웃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또, 누가 힘든 일이 있으면 토닥토닥하며 그래 그럴 수 있지 하고 조용히 위로할 여유가 있는 사람. 


서른 중반 즈음이면 그런 멋진 어른이 되어있을 줄 알았다. 


서른 중반, 중년보다는 훨씬 젊어 미래를 향해 달릴 수 있고, 갓 어른이 되었던 이십 대에서는 충분히 시간이 지나 나름의 연륜과 경력을 가지고 많은 걸 분별할 수 있는 나이. 그런데 막상 그 나이가 되어 나에 관한 문장을 채우는데 생각나는 단어들은 전부 여유의 반대편에 존재하는 단어뿐인 걸 깨닫는다. 불안, 초조, 조바심, 조급함. 어쩌면 내가 이 문장을 완성하고 있게 된 원인들이다.


겉으로 보면 막연하게 그려오던 미래의 나와 지금이 크게 다르진 않다. 괜찮은 회사에서 매일 열심히 바쁘게 일하고, 주말이면 좋아하는 사람들과 비싼 레스토랑에서 성공한 냥 와인이나 샴페인을 마시기도 한다. 날씨가 좋으면 좋아하는 노래를 틀고 드라이브를 갈 수 있고, 여전히 좋아하는 책을 읽고 커피도 마신다. 제법 비싼 시설의 수영장에서 수영을 하고, 퇴근 후에는 부모님의 집이 아닌 돌아갈 내 공간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넷플릭스와 디즈니플러스, 티빙과 왓챠를 전부 돌려가며 맘껏 본다. 그치, 이것이 성공한 어른의 플렉스지.


단지 내가 상상할 수 없었던 건, 실제 서른 중반의 내가 어떤 기분으로 살고 있을 지 였다. 


열심히 일하면서도, 언제까지 내가 일을 계속할 수 있을까 끊임없이 불안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길어지는 경력에 비해 충분한 실력을 쌓지 못한 것 같다는 조바심을 이렇게 느낄 줄도 몰랐다. 


좋은 날 비싼 곳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가도 혼자 집에 돌아가는 길엔 이유없이 눈물을 뚝뚝 흘릴 줄도. 또 혼자 드라이브를 가는 날은 기분을 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울지도 못하는 공허한 마음을 어쩌지 못해서라는 것도. 책과 수영을 취미로 즐기는 게 아니라 이 불안을 조금이라도 잠재우는 수단으로 부여잡고 있을 거라고도. 완벽하게 혼자인 내 공간에서도 자유롭기보다는 언제까지 혼자일까하는 걱정에 잠식당하는 날이 더 많을 줄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지금의 내가 감격스러운 지점들은 있다. 나를 위해 더 나아지고 싶어서 비싼 돈을 내고도 심리상담을 받는 사람이 되었고, 그 기나긴 시간을 견디다 보니, 사랑하는 사람에게 나 자신을 좀 더 잘 설명해내는 사람이 되었다. 예전엔 정말이지 나라는 사람을 보이는 게 막막했었다. 내가 나를 더 잘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되면서 내 옆에 있는 사람을 있는 그대로 봐줄 수 있는 사람이 되기도 했다. 서로의 이해가 맞닿는 순간에는 말할 수 없이 벅차오르는 감정을 느낀다. 


또, 함께 일했던 동기나 선배들이 진심을 담아 멋지다고 말해주거나, 보여준 것도 별로 없는데 나란 사람에 대한 무한 신뢰를 보여줄 때도 있다. 물론, 몇 안되는 사람들이지만 이런 사람들과 만나고 온 날은 그래도 제법 잘 살았다고, 나도 꽤 괜찮다는 생각이 든다. 힘들어하는 친구와 술 한 잔을 할 수 있어서, 그러다 내키면 내 방에서 밤새 이야기하다가 잘 수 있다. 그럴 때는 아주 조금이나마 여유 있는 어른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아직은 나와의 시간을 미처 다 채우지 못해서, 내가 완성한 20개의 문장 속 단어는 전부 여유의 반대편에 있다. 언젠가 내가 나에 대해 쓴다면 여유가 묻어나는 글이길 바랬는데 반대쪽에서 시작하게 되었다. 근데 반대쪽에 서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오히려 미루지 않고 이렇게 글을 쓴다. 그 20개의 불안한 문장만이 내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어서 쓴다. 문장을 글로 풀어내면 불안 뒤에 괜찮은 내가 있다는 걸 믿어서, 아니면 그걸 믿고 싶어서 쓴다. 아마 내가 바라던 것처럼 여유가 묻어나는 글은 쓰지 못하더라도 쓰다 보면 벅차오르는 순간들 몇개는 분명히 기억날 테니까.

작가의 이전글 나는 그냥 너가 애틋해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