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 일지
심리상담을 받게 되면 채워야 하는 질문지 중 ‘문장완성검사’라는 검사가 있다. 여러 문장에 비어 있는 밑줄을 채워 완성하는 검사다.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어른은 —— 이다.' 같은 문장들을 한 스무 개쯤 채우는 검사다. 다른 문장은 몰라도 위 문장은 보자마자 고민 없이 ‘여유 있는 사람’이라고 빈칸을 채웠다.
어릴 적부터 내가 꿈꾸던 멋진 어른은 ‘여유 있는’ 사람이었다. 내면에 단단한 중심이 잡혀있어 엔간한 일에는 흔들리지도 않고 허허하고 웃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또, 누가 힘든 일이 있으면 토닥토닥하며 그래 그럴 수 있지 하고 조용히 위로할 여유가 있는 사람.
서른 중반 즈음이면 그런 멋진 어른이 되어있을 줄 알았다.
서른 중반, 중년보다는 훨씬 젊어 미래를 향해 달릴 수 있고, 갓 어른이 되었던 이십 대에서는 충분히 시간이 지나 나름의 연륜과 경력을 가지고 많은 걸 분별할 수 있는 나이. 그런데 막상 그 나이가 되어 나에 관한 문장을 채우는데 생각나는 단어들은 전부 여유의 반대편에 존재하는 단어뿐인 걸 깨닫는다. 불안, 초조, 조바심, 조급함. 어쩌면 내가 이 문장을 완성하고 있게 된 원인들이다.
겉으로 보면 막연하게 그려오던 미래의 나와 지금이 크게 다르진 않다. 괜찮은 회사에서 매일 열심히 바쁘게 일하고, 주말이면 좋아하는 사람들과 비싼 레스토랑에서 성공한 냥 와인이나 샴페인을 마시기도 한다. 날씨가 좋으면 좋아하는 노래를 틀고 드라이브를 갈 수 있고, 여전히 좋아하는 책을 읽고 커피도 마신다. 제법 비싼 시설의 수영장에서 수영을 하고, 퇴근 후에는 부모님의 집이 아닌 돌아갈 내 공간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넷플릭스와 디즈니플러스, 티빙과 왓챠를 전부 돌려가며 맘껏 본다. 그치, 이것이 성공한 어른의 플렉스지.
단지 내가 상상할 수 없었던 건, 실제 서른 중반의 내가 어떤 기분으로 살고 있을 지 였다.
열심히 일하면서도, 언제까지 내가 일을 계속할 수 있을까 끊임없이 불안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길어지는 경력에 비해 충분한 실력을 쌓지 못한 것 같다는 조바심을 이렇게 느낄 줄도 몰랐다.
좋은 날 비싼 곳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가도 혼자 집에 돌아가는 길엔 이유없이 눈물을 뚝뚝 흘릴 줄도. 또 혼자 드라이브를 가는 날은 기분을 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울지도 못하는 공허한 마음을 어쩌지 못해서라는 것도. 책과 수영을 취미로 즐기는 게 아니라 이 불안을 조금이라도 잠재우는 수단으로 부여잡고 있을 거라고도. 완벽하게 혼자인 내 공간에서도 자유롭기보다는 언제까지 혼자일까하는 걱정에 잠식당하는 날이 더 많을 줄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지금의 내가 감격스러운 지점들은 있다. 나를 위해 더 나아지고 싶어서 비싼 돈을 내고도 심리상담을 받는 사람이 되었고, 그 기나긴 시간을 견디다 보니, 사랑하는 사람에게 나 자신을 좀 더 잘 설명해내는 사람이 되었다. 예전엔 정말이지 나라는 사람을 보이는 게 막막했었다. 내가 나를 더 잘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되면서 내 옆에 있는 사람을 있는 그대로 봐줄 수 있는 사람이 되기도 했다. 서로의 이해가 맞닿는 순간에는 말할 수 없이 벅차오르는 감정을 느낀다.
또, 함께 일했던 동기나 선배들이 진심을 담아 멋지다고 말해주거나, 보여준 것도 별로 없는데 나란 사람에 대한 무한 신뢰를 보여줄 때도 있다. 물론, 몇 안되는 사람들이지만 이런 사람들과 만나고 온 날은 그래도 제법 잘 살았다고, 나도 꽤 괜찮다는 생각이 든다. 힘들어하는 친구와 술 한 잔을 할 수 있어서, 그러다 내키면 내 방에서 밤새 이야기하다가 잘 수 있다. 그럴 때는 아주 조금이나마 여유 있는 어른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아직은 나와의 시간을 미처 다 채우지 못해서, 내가 완성한 20개의 문장 속 단어는 전부 여유의 반대편에 있다. 언젠가 내가 나에 대해 쓴다면 여유가 묻어나는 글이길 바랬는데 반대쪽에서 시작하게 되었다. 근데 반대쪽에 서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오히려 미루지 않고 이렇게 글을 쓴다. 그 20개의 불안한 문장만이 내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어서 쓴다. 문장을 글로 풀어내면 불안 뒤에 괜찮은 내가 있다는 걸 믿어서, 아니면 그걸 믿고 싶어서 쓴다. 아마 내가 바라던 것처럼 여유가 묻어나는 글은 쓰지 못하더라도 쓰다 보면 벅차오르는 순간들 몇개는 분명히 기억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