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로 보는 일상의 재발견 –자음과 모음 근간-
백발
흰머리는 노년의 가장 뚜렷한 증후이다. 처음에 낯설었던 흰머리가 익숙해지면서 세월의 무게를 절감하게 된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노년과 죽음을 예감하고, 제대로 누리지도 못한 채 지나가버린 청춘을 떠올려 보기도 한다. 흰머리가 처음 보일 때에는 뽑기도 하고 더 많아졌을 때에는 염색도 하지만, 흰머리를 그대로 놓아두는 고잉그레이를 하기도 한다. 흰머리는 젊음의 상실을 보여주는 증표일까? 아니면 노년의 지혜를 보여주는 상징일까?
흰 머리 미워하나 난 되레 사랑하니
오래 보면 잠시 머무는 신선과 다름없네.
돌아보매 그 몇이나 이때까지 살았던가.
젊은 데도 다투어서 북망산천 가버린 걸
人憎髮白我還憐 久視猶成小住仙
回首幾人能到此 黑頭爭去北邙阡
-장지완(張之琬, ?∼?), 「흰머리를 자조하며[白髮自嘲]」
사람들은 흰 머리를 못마땅하게 생각하지만 나는 오히려 흰 머리가 사랑스럽기만 하다. 흰 머리가 수북하게 머리를 차지해서 지상선(地上仙)처럼 보이게 만들어 주니 말이다. 흰 머리 노인으로 세상에 아직껏 살아 있는 일도 흔치 않다. 사고나 질병 등으로 제 명을 못 누리고 젊디젊은 나이에 세상을 뜬 사람들도 많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흰 머리가 퇴락을 의미하는 슬픈 표지가 아니라, 장수(長壽)를 의미하는 자랑스러운 증거가 된다.
한 가닥 두 가닥 흰 머리 많아지더니,
순식간에 서른 개 마흔 개 넘었다네.
장부 마음 푸른 하늘 위에다 두고 있어,
밤마다 경서 보다 늙어짐 어이하랴.
一莖二莖白髮多 三十四十須臾過
丈夫心事靑冥上 夜對遺經柰老何
이익(李瀷),「흰 머리[白髮]」
처음에 흰머리가 한 올 두 올 눈에 띄더니 순식간에 흰머리가 자리 잡았다. 사내대장부는 고원한 것을 지향해서 밤마다 성인이 남기신 경전에 푹 빠져 살고 있다. 그렇게 세월은 흐르고 나이는 먹는다. 흰 머리가 많아지는 것에 대한 아쉬움을 가지기보다 주어진 삶에 대한 순명(順命)을 택했다.
어린 딸은 흰 머리가 많은 게 안됐는지
보는 대로 뽑아주나 금세 또 다시 나네.
시름 속에 늙는 일을 막지 못함 잘 알지만,
거울 속 흰 머리에 놀라는 일 면하누나.
성글어진 내 머리털 누가 이리 만들었나
점점 더 빠져서는 어찌할 도리 없네.
검은 머리 뽑지 말라 할 때 마다 당부하지만
공연스레 늙은이 될까 봐서 두렵다네.
幼女憐吾白髮多 纔看鑷去忽生俄
極知無益愁中老 且免斗驚鏡裏皤
種種始緣誰所使 駸駸漸至末如何
鋤根每戒傷嘉糓 猶恐公然作一婆
윤기(尹愭),「어린 딸아이가 내 흰 머리를 족집게로 뽑아 주므로 생각나는 대로 읊다[幼女鑷白髮謾吟]」
이 시는 윤기의 나이 47세 때인 1787년 겨울에 지은 것이다. 나이 어린 딸은 아빠의 흰 머리에 마음이 쓰였다. 흰 머리가 보이기만 하면 어디선가 족집게를 들고와서 머리를 뽑아준다 야단이다. 그렇지만 흰머리를 뽑아봐도 자꾸만 새로 흰머리가 자라난다. 어차피 시름 속에 늙어가는 것이라 흰 머리 뽑는 일이 소용없는 일이란 건 알겠지만 거울 속에 자신의 흰 머리를 보고 놀라는 일은 잠시 면할 수 있다. 딸아이가 흰머리를 뽑는답시고 멀쩡한 검은 머리까지 뽑아서 이제 머리털이 성한 것도 별로 없다. 흰머리 걱정에다 대머리 걱정까지 더한 셈이다. 끝으로 흰머리 몇 가닥 없애려다 대머리가 되어 폭삭 늙어버린 노인이 될까봐 걱정을 했다. 딸아이의 어설픈 실수를 통해 노년의 서글픔을 유쾌하게 풀어냈다.
세월은 재빨리 흘러간다. 이익은 “삼십 년 후에는 너희가 바로 나이고, 삼십 년 전에는 내가 바로 너희였네(三十年後爾是我, 三十年前我是爾)”라 했다. 탄로(歎老) 곧 늙음을 탄식해 보아야 불가역적인 청춘의 시간들을 되돌려 놓을 방법은 없다. 흰머리는 내게 지상에서의 남은 시간들을 수시로 알려주는 훌륭한 알람이다. 기억하라! 삶은 너무도 짧고 우리는 죽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