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로 보는 일상의 재발견 –자음과 모음 근간-
무더위
한국의 여름 더위는 정말 만만치 않다. 습도가 높아서 실제 아프리카보다도 더 덥게 느껴진다고 한다. 오죽하면 대서(大暑)에는 염소 뿔도 녹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꽤 여러 해 전에 나온 폴링 다운(Falling Down, 1993)이란 영화가 있다. 말할 수 없는 더운 날에 차는 막혔는데 에어컨은 고장 나고 파리는 웽웽된다. 주인공은 인내심이 바닥이 나면서 사고를 치게 된다. 웬일인지 여름만 되면 나는 이 영화가 떠올려진다. 옛날에 더위를 가시게 하는 것이라곤 부채질이나 탁족(濯足)이 고작이었다. 옛 사람들은 무더위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었을까?
찌는 더위 불보다 더 심해서는
일천 화로에 붉은 숯불 부채질하네.
풍이도 더위 먹어 죽을 것이니
불길이 수정궁까지 닿을 것이네.
酷熱甚於火 千爐扇炭紅
馮夷應暍死 燒及水精宮
이규보(李奎報), 「무더위[苦熱]」
어찌나 더운 지 일 천 개의 화로에서 지글지글 숯불이 피어 내는 열기와 같다. 풍이는 물을 맡은 신(神)의 이름이고 수정궁(水精宮)은 여러 가지 뜻이 있지만 여기서는 용왕의 궁전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물의 신도 더위 먹어 죽게 될 지경이고, 더운 열기가 물속에 있는 용왕의 궁전까지 닿는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같은 제목으로 2편의 시를 남겼는데 다른 한 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누우면 일어나서 날고 싶었고, 일어나면 다시 벗고 눕고 싶었네. 누가 시루 속 찜을 가엾게 여겨, 옮겨다가 물속에다 앉게 하려나[臥欲起奮飛, 起思還裸臥. 誰憐甑底蒸, 移向水中坐]” 누워서도 일어나서도 견딜 수 없는 더위에 답답하고 짜증이 치밀어 올라 차라리 물속에 고개만 쑥 빼고 앉아 있고 싶다고 했다. 더워도 더워도 어지간히 더웠던 모양이다.
창문은 푹푹 쪄서 땀은 줄줄 흐르고
불타는 해와 구름에 낮 시간 지루하네.
다행히 마음이 물처럼 될 수 있어
도리어 더운 곳에서도 서늘함 만들었네.
軒窓蒸鬱汗翻漿 赤日彤雲晝刻長
賴有寸心能似水 却於炎處作淸凉
이숭인(李崇仁, 1347~1392), 「무더위[苦熱]」
날씨가 푹푹 쪄대서 땀이 줄줄 흐르는데 낮 시간은 지루하게만 흘러간다. 시원한 물을 한바탕 몸에 끼얹어 보아야 그때뿐이라, 마음을 물 삼아 보기로 생각 한다. 서늘하게 기분 좋은 가을바람, 시원한 얼음 동동 띄운 물, 무릎팍까지 수북하게 쌓인 눈, 살갗이 찢겨 나갈 것 같은 된바람 등을 떠올려 본다. 갑자기 한기(寒氣)가 느껴져서 무더위를 잠시나마 잊게 된다. 마음으로 하는 피서법이니 얼마나 운치 있는가.
온몸에 하루 종일 땀 줄줄 흘러내려
부채질 효과 좋아 계속해서 부쳐대네.
밭일하는 사람들이 괴로울 것 생각하니
초가집 좁다지만 수심을 달래보네.
渾身竟日汗漿流 揮扇功高不暫休
想到夏畦人正病 茅廬雖窄亦寬愁
이익(李瀷),「무더위[苦熱]」
하루 종일 땀이 가실 시간이 없어서 연신 부채질만 해댄다. 이럴 때 뙤약볕 아래에서 밭일을 하는 농부들을 떠올려 본다. 아! 내가 더운 것은 아무 것도 아니었구나. 갑자기 더위가 가신 것만 같고, 더위에 고생하는 사람들에게 미안해진다. 지금도 이와 다를 바 없다. 에어컨 아래에서도 덥다고 투정을 부리곤 한다. 이 더위에 택배를 나르고, 공사장에서 일하며 시장에서 물건을 파는 분들은 여전히 야외에서 일할 수밖에 없다. 세상에 힘든 사람은 너무도 많고 내가 힘든 것들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태양의 열기가 어찌 이리 맹렬한지
불 일산(日傘) 펼친 데다 화로로 에워싼 듯
길 가는 행인들은 더위 먹은 사람 많고
동산에 가꾼 채소 시들어 죽어가네
맨발로 쌓인 얼음 밟는 것 생각하며
종놈 불러 큰 부채나 부치게 할 뿐이네.
어이하면 하늘 오를 사다리 얻어서는
은하수 기울여서 불볕더위 씻어낼까
陽烏赫烈一何威 火傘張空爐四圍
道上行人多暍病 園中蒔菜盡萎腓
思將赤脚層氷踏 徒喚蒼頭巨扇揮
安得雲梯登九萬 手傾銀漢洗炎暉
윤기(尹愭), 「무더위[苦熱]」
이 시는 윤기가 12세 때인 1752년(영조28) 여름에 쓴 것이다. 불로 만든 일산을 쓰고 화로를 사방에 에워 싼 듯 그렇게 태양빛은 강렬하게 쏟아져 내렸다. 행인들은 더위 먹어 지쳐 있었고 채소들은 말라 비틀어 죽어간다. 이때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맨발로 얼음을 밟는 상상을 하며 종놈을 불러 부채나 부치게 하는 일 뿐이다. 은하수를 기울여 한바탕 비를 뿌려 대서 더위를 식히고 싶다. 비라도 내려서 무더위가 한풀 꺾이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무더위와 강추위 어느 것이 더 고통스러울까. 신영복의『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보면, “모로 누워 칼잠을 자야하는 좁은 잠자리는 옆 사람을 단지 삼십칠 도의 열덩어리로만 느끼게 합니다. 이것은 옆 사람의 체온으로 추위를 이겨나가는 겨울철의 원시적 우정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형벌 중의 형벌입니다”라 하면서 여름 징역은 자기의 바로 옆 사람을 증오하게 한다고 말했다.
삶이란 못 견디게 힘들다가도 참다보면 거짓말처럼 좋은 일이 하나씩 생기곤 한다. 무더위도 이와 다르지 않다. 무더위를 참고 견디다 보면, 어느새 가을이 되어 서늘한 바람이 불어온다. 그동안 한 철의 고통이 얼마나 힘들었냐고 위로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