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산 –작지만 커다란 아름다움-
낙산 –작지만 커다란 아름다움-
낙산(駱山)은 서울의 종로구와 동대문구, 성북구에 걸쳐 위치한 산이다(고도:97m). 산모양이 낙타의 등과 같다고 해서 낙타산(駱駝山)이라고 하였는데 낙산으로 줄여 불렀다. 또, 타락산(駝駱山)이라고도 불렀으니 유우소(乳牛所, 궁궐에 우유를 공급하던 곳)가 낙산에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왕조실록』에 “타락산이 궐내(闕內)를 굽어 눌러 있으니, 그 밑에 목책을 설치하여 올라가서 바라보지 못하게 하라.”라고 했다. 조선 연산군 연간에 성내를 들여다보지 못하도록 낙산의 인가를 철거하게 하였다는 내용이 여러 차례 나온다. 현대에 들어서도 여전히 낙산에 대한 기억은 남아 있다. 임화는「할미꽃 의젓이 피는 낙타산록의 춘색」(조광, 1936.4)에서 서울을 둘러싼 북악산, 인왕산, 종남산 등과 낙산을 비교하면서, 낙산이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 말했다.
희미한 달 떠오르고 별들이 많아지니
누대의 곳곳마다 노랫소리 들리었네.
구름 너머 들려오는 또 다른 곡조 소리
낙산에서 불어대는 태평소 가락이네.
淡月初升星漸多 樓臺處處起笙歌
別有搖搖雲外響 太平簫弄駱山阿
윤기(尹愭),「성안의 저녁 풍경 5수[城中暮景 五首]」중 3번째 시
요즘 낙산은 LA 야경을 아름답게 담은 영화 ‘라라랜드’에서 따와 ‘낙산랜드’로도 불린다. 낙산은 야경이 아름다워 드라마나 영화의 단골 장소로 등장하곤 한다. 이곳은 조선시대에도 야경이 아름다웠던 곳이었다. 위의 작품은 윤기가 52세에 지은 것이다. 땅거미가 지자 봉화대에 불이 들어올 때부터 인경 종이 울려 통근이 시작되는 시점까지 시간 순서대로 5수를 읊었다.
달이 막 떠오르고 별이 하나 둘 하늘을 차지하고 나자, 누대의 여기저기에서 노랫소리가 울려 퍼진다. 야경을 즐기러 온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어디 그뿐인가. 낙산의 어디쯤인가에서 태평소 소리가 들려온다. 노래와 악기 소리가 잘 어우러진 멋진 밤이었다. 도시화가 진행된 지금에도 이곳은 여전히 아름다운데, 그 옛날에는 지금보다 더 볼 만 했을 것이다.
낙산에는 유적이 많이 있다. 효종의 아우 인평대군(麟坪大君)의 거처인 석양루(夕陽樓)가 있었다. 효종(孝宗)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아우인 인평대군과 집을 나란히 짓고 각각 ‘조양루’(朝陽樓)’와 ‘석양루’(夕陽樓)라 부르며 서로 우애 있게 지냈다고 한다. 이곳은 유한준과 그의 아들 유만주가 즐겨 찾았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중기 문신 신광한(申光漢)의 집터를 신대(申臺, 申岱 혹은 企岱로도 쓴다)라 하였다. 신대동이란 의미의 신댓골이라 불리기도 했다. 문일평의『근교산악사화(近郊山岳史話)』에 “당시까지 신대 우물에는 바가지로 물을 푸는 아낙네들의 행렬이 끊이지 않았다고 하는데, 얼마 뒤 호남의 부호인 김종익(金鍾翊)이라는 사람의 소유가 되었다”고 한다.
『동국여지비고』 ‘제택(第宅)’조에 “신광한의 집이 낙산 아래에 있는데, 사람들이 신대라고 하여 명승지로 꼽았다. 표암 강세황이 ‘홍천취벽(紅泉翠壁)’이라고 네 글자를 써서 바위에 새겨놓았다”라고 했다. 이 큼직한 각자(刻字)가 1960년대 초까지도 남아 있었으나 지금은 땅에 묻혀 있다. 이 신대 자리는 나중에 이승만이 거처한 이화장(梨花莊)이 되었다.
지봉 이수광이 살았던 비우당(庇雨堂)도 빼놓을 수 없다. 이곳은 원래 이수광의 5대 외조부 유관(柳寬)이 살던 곳으로 초가 몇 칸을 짓고 비가 오면 우산으로 새는 비를 받았다고 한다. 그 뒤에 지봉의 부친 이희검(李希儉)이 이 집을 조금 넓히고 살았는데 어떤 손님이 너무 소박하다고 하자, “우산에 가릴 정도가 되면 이미 사치한 것이지요.”라고 하였다. 임진왜란 때 전소되자, 지봉이 다시 작은 집을 짓고 ‘겨우 비바람을 가린다[僅庇風雨]’는 뜻에서 ‘비우당’이라 편액을 달았다고 한다.
이곳은 단종과 정순왕후의 슬픈 사연을 담은 곳이기도 하다. 비우당 뒤에는 자지동천(紫芝洞泉)이라 불리는 작은 샘물이 있다. 정순왕후가 서인으로 강등되어 청룡사(靑龍寺) 부근에서 살면서 이 샘물에서 옷감에 자줏물을 들여 팔아 생계를 이었다 한다. 단종이 죽은 뒤에 정순왕후는 허경(虛鏡)이란 법명을 받고 불교에 귀의하여 청룡사에 있었다. 그녀가 죽을 때까지 영월 쪽을 바라보며 단종의 명복을 빌었다는 동망봉(東望峰)도 여기에 있다.
…그 가운데에서 가장 기이한 것은 낙산(駱山) 일대였다. 모래는 하얗고 소나무는 푸르다. 그 밝고 고운 모습이 마치 그림과 같다. 여기에 다시 작은 산 하나가 마치 엷은 먹물 색의 까마귀 머리와 같이 낙산 동쪽에 솟아 있다. 그 산이 구름 속으로 보이는 양주(楊州) 지방의 산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문득 들었다. 이날 밤 나는 술에 아주 취해 서여오(徐汝五 : 서상수)의 집의 살구나무 꽃 아래에서 잠이 들었다.…
유득공은 「춘성유기(春城遊記)」에서 낙산의 아름다움 모습을 찬탄했다. 모래는 희고 소나무는 푸르며 산은 검으니, 그 자체로 그림과 다름없었다. 아름다운 풍경에 취했는지 술에 취했는지 그는 서상수 집의 살구나무 꽃 아래에서 잠을 잤다. 이처럼 아름다운 풍경을 간직하고 있어서 유독 낙산에는 수많은 명사(名士)들의 거처가 많았다.
동봉에 구름 안개 아침 햇살 가려서
나무에 깃들인 새 늦도록 가만있네.
이낀 낀 옛 집에는 홀로 문 닫혔는데
뜰 가득 맑은 이슬 장미꽃 적시었네.
東峰雲霧掩朝暉 深樹棲禽晩不飛
古屋苔生門獨閉 滿庭淸露濕薔薇
최경창,「낙봉의 인가[駱峯人家]」
낙산에 있던 누구의 집이었을까. 구름과 안개가 아침 햇살을 가려서 숲 속 새들은 아침이 온 줄도 알지 못했다. 거기 이끼가 낀 오래된 집 한 채가 있다. 문은 누구의 출입도 허락하지 않는 듯 단단히 잠겨 있고, 그 옛날의 화려한 시절을 기억하듯 장미는 그렇게 피어 있었다. 안개와 구름, 이끼, 이슬이 대신 차지한 집에는 사람의 자취를 찾아 볼 수는 없다.
낙산에 옛 사람의 자취는 거의 사라지고 없다. 그러나 그때의 풍경을 충분히 떠올릴 수 있을 만큼 아름다운 모습만은 여전하다. 낙산은 야경만 멋진 곳이 아니다. 비가 주적주적 내릴 때 낙산을 따라 걸어 보기를 권한다. 꿈속에서 만났을 선경(仙境)처럼 아스라하던 그 길을 만날 수 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