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로 보는 한양’ 6

삼청동(三淸洞), 한양 최고의 경치

by 박동욱

삼청동(三淸洞), 한양 최고의 경치


삼청동은 바위가 많아 계곡이 발달했고 우물도 많았다. 이곳은 한양에서도 손꼽히는 명승으로 3월이 되어 복사꽃이 피면 많은 사람들이 꽃놀이하며 즐기던 곳이었다.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소격서도 여기 있었다. 유본예(柳本藝)의『한경지략(漢京識畧)』에도 삼청동에 대한 기록이 나오는데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이곳에는 삼청도관(三淸道觀)이 있었다. 냇물이 석벽에 흐르고 석벽 위에는 대대로 이곳에서 살았던 감사 이상겸(李尙謙)이 쓴 ‘삼청동문(三淸洞門)’ 넉 자가 새겨져 있다. 또 민정중의 옛 집과 성삼문의 옛 집 장원서가 있었다. 장원서 뜰에는 소나무가 있었는데, 30년 전까지도 말라 죽은 나무가 있었다.”

유본예의『한경지략』에서는 ‘삼청동문’ 각자가 이상겸의 글씨라 했으나, 성해응의 「記京都山水」에서는 이 각자를 김경문(金敬文)의 글씨라 했다. ‘삼청동문’ 각자 왼편에 임술 사월각(壬戌 四月刻)이라 했으니, 이상겸이라면 1802년, 김경문이라면 1682년에 새겨졌을 것이다. 장지연의「유삼청동기」에는 송시열의 글씨라고 나온다. 어쨌든 이 각자는 지금도 남아 있다.

이외에도 삼청동에는 이름난 명소가 많았다. 우선 읍청정(挹淸亭)을 들 수 있다. 1769년 중복 날에 유금·유곤·이덕무·박제가·유득공·서상수가 이 정자에 올랐다. 이때 유금이 남긴 시가 남아 있다. 유만주는 1786년 8월 22일에 지인 몇 명과 함께 삼청동에 가을 소풍을 와서 이곳을 찾았는데『흠영』에서는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읍청정은 계곡을 마주보고 우뚝 솟았는데, 연못물이 난간 가장자리를 휘돌아가도록 지어 놓았으니, 그 차지하고 있는 형세가 깊숙하고 안온하다. 나무숲이 무성하게 우거지고 사이사이 붉은 잎이 섞여 있다.”

조선 후기 삼청동의 주인은 김조순과 아들 김유근이다. 김유근은 삼청동에 옥호정(玉壺亭)을 만들어 당대 명사들을 모이게 했다. 또, 김려는 1811년 경제적 이유로 여주를 떠나 서울의 삼청동으로 거처를 옮겼다. 삼청동 셋집의 이름은 만선와(萬蟬窩)로 ‘매미들이 울어대는 작은 집’이란 뜻이다.


삼청동 (삼청동문).jpg


옥동엔 안개와 놀 따뜻하였고

고운 모래엔 해 그림자 더디네.

냇가에서 찬술을 데우려는지,

동자는 솔가지를 꺾고 있다네.

玉洞烟霞暖 金沙日影遲

溪頭煮寒酒 童子折松枝

최경창(崔慶昌), 「삼청동(三淸洞)에서 입으로 읊다[三淸洞口占]」


이 시는 삼청동에서 놀다가 그 자리에서 즉흥적으로 쓴 것이다. 삼청동 골짜기에는 안개와 노을까지 따사롭다. 햇살도 아쉬운 듯 늦게까지 비추고 있다. 이 공간은 따스한 분위기[暖]와 더디게 긴 시간[遲]을 함께 하고픈 곳이었다. 동자가 소나무 가지를 꺾어 개울가에 모닥불을 피워서, 가지고 온 술을 끓이고 있다. 동자가 등장함으로써 자신을 신선으로 격상시켜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 시는 다채로운 감각을 사용하고 있다. 노을, 안개, 해그림자는 시각을, 차가운 술은 촉각을, 솔가지의 향기는 후각적 표현을 써서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과 같은 풍경을 만들어 냈다.




비 그치니 늦봄에 증석의 말 생각나는데

보이는 풍경마다 눈길 따라 새롭다네.

막 비 갠 나무에는 고운 꽃 찬란하고

거나히 취한 사람 편안 옷 너울대네.

새들은 미풍에 실려 푸른 숲을 옮겨 다니고

나무는 햇살 아래 먼지 속에서도 편안하네.

누대의 빛나는 모서리 자세히 세느라고

고운 모래에 탕건이 떨어지는 줄도 잊었네.

雨止還思詠暮春 眺來光景逐眸新

花濃燁燁纔晴樹 衣穩仙仙澹醉人

鸛鷺微風移積翠 松杉麗日宿纖塵

樓臺細數觚稜炫 忘却金沙偃墮巾

이덕무(李德懋), 「삼청동(三淸洞)에서 맑은 경치 바라보다[三淸洞晴眺]」


늦봄에 비가 쏟아진 뒤에 보이는 삼청동의 경치를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1구는『논어』「선진(先進)」에 “늦은 봄에 봄옷이 만들어지면 관을 쓴 벗 대여섯 명과 아이들 예닐곱 명을 데리고 기수(沂水)에서 목욕하고 무우(舞雩)에서 바람 쏘이고 시를 읊으며 돌아오겠습니다.〔莫春者 春服旣成 冠者五六人 童子六七人 浴乎沂 風乎舞雩 詠而歸〕”라고 한 데서 유래한 말이다. 1구를 상세히 번역하면 다음과 같겠다. “비가 그치니 늦봄에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 쏘이고) 노래하며 돌아오고 싶다던 (증석의) 말이 생각나는데” 비 갠 나무에는 고운 꽃이 찬란하게 피어 있고, 비속에 술 마시던 사람은 그새 취하여 휘청휘청 거려 옷이 펄렁거린다. 황새와 백로는 비가 개고 미풍이 불어오자 그 틈을 타서 숲을 옮겨 다니고, 소나무와 삼나무는 아름다운 햇살 아래 먼지 속에서도 편안했다. 제5구가 원경인 삼청동 뒷산 쪽을 향하여 보고서 묘사했다면 제6구는 근경인 삼청동에서 종로나 광화문 쪽을 보고 묘사했으니 한양 도성 안은 홍진의 세상으로 보았기에 소나무와 삼나무가 그러한 배경으로 하여 먼지 속에서 편안하다고 표현한 것이다. 누대의 모서리마다 쳐다보느라 탕건을 땅에 떨어지는 줄도 모르고 시간을 보냈다. 이덕무 특유의 감성으로 삼청동의 경치들을 섬세하고 아름답게 읊었다.




푸른 산과 깊은 물에 첩첩으로 막혔으니

백로원 그 서쪽이 바로 내 집이라네.

생각건대 문 앞의 높다란 버드나무

주인도 없는 곳에 까마귀만 우짖으리.

靑山綠水萬重遮 白鷺園西是我家

遙想門前喬柳樹 主人不到但鳴鵶

김려,「황성리곡(黃城俚曲)」 중에서


『황성리곡(黃城俚曲)』은 『사유악부(思牖樂府)』와 함께 김려의 대표적인 시집이다. ‘황성’은 충청남도 연산의 옛 지명으로, 그가 1817년(순조 17) 연산현감으로 부임하여 1819년 사임할 때까지의 생활을 시로 표현했다. 김려는 연산에서 한양 땅 삼청동에 있는 자신의 집을 그리워했다. 백로원(白鷺園)은 맹공원(孟公園)이라고 하는데, 맹만택(孟萬澤, 1660∼1710)의 집을 가리킨다. 자신의 집 앞에는 높다란 버드나무가 있는데, 아마도 그 나무에서 까마귀만 울고 있을 것이라고 짐작을 했다. 그는 주인 없는 집의 풍경을 스산하게 그리고 있다.



삼청동 (옥호정도 19세기).jpg 옥호정도


삼청동 골짜기는 바위와 비탈이 깎아지른 듯 나무도 그윽이 우거진 속을 이루고, 높은 데서 흐르는 물이 깊은 연못을 짓는다. 다시 물은 돌바닥 위로 졸졸 흘러 이곳저곳에서 가느다란 폭포를 이루며 물구슬마저 튀기곤 한다. 여름철에도 서늘한 기운이 감돌아서 해마다 한여름이면 장안의 놀이꾼 선비는 말할 것도 없고 아낙네들까지도 꾸역꾸역 모여들어 서로 어깨를 비빌 만큼 발자국 소리도 요란하였다. -장지연.「유삼청동기」-


장지연이 살던 1921년 이전까지 삼청동은 도시의 계곡이었다. 일제 강점기 이후부터 삼청동에 살림집이 들어섰다. 이제 삼청동은 화랑과 갤러리숍, 박물관, 공방, 음식점이 대신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나마 삼청공원만이 옛 정서를 조금 느끼게 해준다. 삼청공원은 작지만 아름답다. 그곳에 비 내리는 풍경은 한번 보게 되면 오래도록 잊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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