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은사(奉恩寺), 삼당(三唐) 시인이 즐겨 찾던 절
봉은사(奉恩寺), 삼당(三唐) 시인이 즐겨 찾던 절
봉은사는 강남 한복판에 있는 절이다. 이 절은 고려 때 창건되었다. 보우는 1562년에 중종의 능인 정릉(靖陵)을 선릉(宣陵) 동쪽으로 옮기고 절을 현 위치로 이전하여 중창하였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사찰은 병화로 소실되었고, 그 후에 중건 되었다가 여러 번 화재와 중건을 반복했다. 특히 ‘판전(板殿)’ 편액은 김정희가 죽기 3일 전에 쓴 것인데 걸작으로 꼽힌다.
절과 관련된 이름난 인물도 많았다. 1925년 대홍수 때 당시 주지였던 청호 스님(晴湖, 1875~1934)이 배를 끌고 가서 708명을 구해냈다. 그때 살아남은 사람들이 돈을 모아 수해공덕비를 세웠고, 당대 명사들은 구제 활동을 칭송하며 ‘불괴비첩(不壞碑帖)’을 편찬 했다. 법정 스님도 이 절을 거쳐 갔다. 1960년대 말부터 수년간 봉은사 다래헌에 머물며 불경 번역에 참여하였다. 당시 봉은사의 앞날을 걱정하는 글을 불교신문에 기고한 적이 있다.
우연히 휴가 받아 절간에 찾아와서
술잔 잡고 시 지으니 좋던 일 남아 있네.
연못의 붉은 연꽃 바람 뜰에 가득하고
천 개 나무 매미 울고 비는 마을로 돌아가네.
흰 머리로 벼슬에 매인 것 부끄럽지만
푸른 산 고향 같아 그나마 기쁘다네.
금호의 안개 낀 경치 기이타 들었으니
배 돌려 선경 찾아 가는게 좋으리라.
偶因休浣到雲門 把酒題詩勝事存
紅藕一池風滿院 晩蟬千樹雨歸村
深慙皓首從羈宦 猶喜靑山似故園
聞說錦湖煙景異 會容孤棹問眞源
백광훈(白光勳),「봉은사 연정에서 교리 이백생이 지어 보여준 시에 차운하다[奉恩寺蓮亭 次李校理伯生見示之作]」
이 시는 1578년 여름에 쓴 작품으로 여러 선집에 실려 있다. 벼슬살이 하다 휴가를 받아 봉원사를 찾아왔다. 젊은 시절 이곳에서 놀았으니 벌써 20년이 훌쩍 지나버렸다. 바람이 부는데 연못에는 붉은 연꽃이 피어 있었고, 비가 한차례 쏟아지고 물러가자 온 나무에서 미친 듯이 매미들이 울어댄다. 절에 오니 늘그막에 변변찮은 참봉 벼슬에 매인 몸이 더욱 부끄럽지만, 아름답게 펼쳐진 광경은 고향과 같아 그나마 기쁜 마음이 든다. 7구에 나오는 금호(錦湖)를 두고는 견해가 엇갈린다. 금호는 한강 변에 있는 동호(東湖)로 볼 것인지, 아니면 전라도 금산(錦山)의 광석강(廣石江)으로 볼 것인지가 문제다. 후자는 송준호 교수의 주장인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백생 곧 이순인이 서울 출신임에도 산수(山水)를 사랑하여 전라도 금산의 광석강에 정자(亭子)를 짓고 이사를 가서 살고 있었는데, 이때 금산의 광석강을 미화(美化)하여 ‘금호(錦湖)’라고 호칭한 것이 분명하다”. 어디로 보든 아름다운 풍경을 찾아가고픈 마음과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가고픈 심정을 함께 담은 것이다.
삼월 달 광릉에는 온 산에 꽃 폈는데
갠 강에 가는 길은 구름 속 잠겨 있네.
배 안에서 등을 돌려 봉은사 가리키니
소쩍새 울어댈 제 스님 빗장 내리겠지.
三月廣陵花滿山 晴江歸路白雲間
舟中背指奉恩寺 蜀魄數聲僧掩關
최경창(崔慶昌), 「봉은사 승려의 시축에 쓰다[奉恩寺僧軸]」
이 시는 봉은사에 들러 스님을 만나고 돌아가면서 쓴 것이다. 광릉은 봉은사가 있는 한강 남쪽을 이르는 말로, 여기에 있는 산들에는 꽃이 활짝 펴 있었다. 반면에 뱃길로 가는 길은 구름 속에 잠겨 있었다. 배 안에서 봉은사 쪽을 바라본다. 이때 밤이 되면 저 절의 빗장을 닫고 있을 스님이 떠올려진다. 미련이 남아서일까? 헤어진 뒤에 그 스님이 무엇을 하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성곽 나서 강물을 건너가보니
젊은이들 왕래가 제법 많구나.
매번 최씨와 백씨 이끌고 와서
절집에서 시재를 겨루어댔지.
옛날 벗은 세상을 다 떠나가고
세월은 다음 차례 재촉을 하네.
읊조리며 기둥에 한참 기대 있으니
서녘 해가 생대에 저물어가네.
出郭渡江水 少年多往來
每携崔白輩 僧院課詩才
舊友凋零盡 流年次第催
沈吟倚柱久 西日下生臺
이달(李達), 「동호의 절에서 스님의 시축을 보니 최경창과 백광훈의 시가 있었다. 기분이 서글퍼서 시를 지어준다[湖寺 見僧軸有崔白詩 愴懷有贈]」
마침 봉은사를 갔더니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이달은 이곳에서 예전에 최경창과 백광훈과 함께 시를 읊곤 했었다. 백광훈은 1582년에, 최경창은 1583년에 세상을 떴으니 이 시는 1583년 이후에 쓴 것이다. 그들의 시를 우연히 시축에서 보게 되었다. 이제는 세상을 떠난 시우(詩友)들이 울컥하고 생각난다. 그렇게 세상에 누구는 남겨졌고 누군가는 떠나갔다. 봉은사는 친구들과 시흥(詩興)이 넘쳐 나던 곳에서, 부재의 공간으로 뒤바뀌었다. 생대(生臺)는 절에서 새나 짐승에게 먹이를 주는 대인데, 여기로 해가 지고 있다. 그렇게 오래도록 옛 벗을 생각하느라 한참 자리를 뜨지 못했다.
봉은사는 삼당시인들만 시를 남긴 것이 아니다. 정두경(鄭斗卿), 이경석(李景奭), 신위(申緯), 김정희(金正喜) 등의 시가 있고, 근세에는 장지연(張志淵)과 오세창(吳世昌)도 시를 남겼다. 시에 나오는 아름다운 종소리가 싶다면 밤에 훌쩍 찾아가도 좋을 것 같다. 봉은사는 9호선 봉은사역에서 하차해서 300m만 걸으면 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