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화진(楊花津), 해질녘이 아름다운 나루터
양화진(楊花津), 해질녘이 아름다운 나루터
양화진은 광화문에서 서남방 약 6km 거리의 한강변에 위치한 나루터이다. 다른 이름으로는 양화도(楊花渡)가 있다.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에는 한양과 강화, 한양과 삼남(三南) 지방을 잇는 교통의 요지이며 전략 요충지였다. 양화진은 1866년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 함대가 한강으로 들어올 때 한양 주민들이 서양세력과 처음 만난 곳이기도 하다. 양화진 동쪽의 작은 봉우리는 머리를 치든 누에와 닮은 형상이라 하여 잠두봉(蠶頭峰)이라 불렸다. 이곳은 1866년 천주교도들이 처형당한 절두산(切頭山) 성지로 더 알려져 있다. 1894년 3월 갑신정변의 주역 김옥균(金玉均)의 시신이 이곳으로 옮겨져 효수(梟首)되기도 했다. 잠두봉은 서소문 밖의 장터거리, 당고개, 새남터와 함께 대표적인 행형장(行刑場)이었다.
양화진은 예로부터 경치가 빼어난 곳으로 이름이 높았다. 양화진 일원의 경관은 서강역으로부터 양화진에 이르는 300m거리에 조성된 버드나무 후자(堠子) 숲, 잠두봉의 울창한 송림과 느티나무 고목이 양화진, 망원정, 제천정, 파청루 등의 인공 시설들과 조화를 이룸으로써 명성을 얻은 것이다. 유본예의 『한경지략(漢京識略)』을 보면 “양화진은 경치가 좋아 명나라 사신들이 매일 그곳에 나가 놀며 시를 지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특히 해질녘과 눈이 내릴 때 아름다워서 ‘양화석조(楊花夕照)’와 ‘양화답설(楊花踏雪)’을 노래하기도 했다. 한강진, 송파진과 함께 한강의 3대 나루였지만, 한강 수운이 중단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복사꽃 뜬 물 따스하고 부들 싹 짤막하니
복어가 여울 거슬러 올랐단 소식 들었네.
낚싯대 하나 잡고 강가로 가고 싶지만
밤에 가랑비 내리니 봄추위 겁이 나네.
桃花水暖蒲芽短 聞道河豚已上灘
欲把一竿江上去 夜來微雨㥘春寒
이정귀(李廷龜), 「양화진(楊花津)에 복어가 바야흐로 올라오고 있다는 말을 듣고 입에서 나오는 대로 읊어 강객(江客) 성 참봉(成參奉) 복(輹) 에게 주다(聞楊浦河豚方上 口占贈江客成參奉輹)
예전에는 한강변에서 잡은 복어를 즐겨 먹었다. 특히 양화진의 복어가 유명했는지 남효온(南孝溫)의 「양화(楊花) 나루에서 강물을 거슬러 오르며(楊花渡 泝流而上)」에서도 “강 남쪽 물가는 초록빛으로 물들고, 복어 배는 북처럼 불룩하네(艸綠江南浦 河豚腹如鼓)”라 나온다. 이처럼 양화진에서 복어는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물고기였다. 위의 시에서는 복어 철이 되어 강가에 나가 복어를 잡고 싶지만 봄날 밤 가랑비까지 주적주적 내리니 꽃샘추위가 겁이 나서 할 수 없다고 했다. 사실은 복어를 잡아 지인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갖고 싶다는 마음을 담은 것이다.
버들꽃 눈처럼 흩날리었고
복사꽃 불타는 듯 붉게 피었네
저무는 강 그림처럼 수를 놓고도
서편 하늘 석양이 남아 있었네.
楊花雪欲漫 桃花紅欲燒
繡作暮江圖 天西餘落照
차운로(車雲輅), 「양화진의 석양(楊花夕照)」
양화진은 평소 때도 아름다웠지만, 해가 지거나 눈이 내리면 더욱 장관이었다. 위의 시에서는 양화진의 해질녘을 그리고 있다. 버들꽃과 복사꽃이 꽃잔치를 벌였고 강과 하늘은 온통 저녁놀이 차지했다. 성임(成任,1421~1484)은 「한성부십영 양화진에서 눈을 밟다(漢城府 十詠 楊花踏雪)」에서 “강변 물새들의 자취는 사라지고, 천상의 옥가루가 선장(仙掌)에 날린다……(江邊鷗鷺絶影響 天上玉屑霏仙掌)”라 하였다. 옥가루가 신선의 손바닥에 날린다는 표현은 잠두봉이나 선유봉 위에 눈이 날리는 모습을 말한 것으로 보인다. 선계(仙界)의 풍경처럼 신비롭게 묘사했다.
양화나루 어귀에 우뚝 솟은 잠두봉
올라보니 사방 산이 나직함 알게 됐네.
마호(麻湖) 북쪽 당촌(棠村)에는 늙은 나무 서 있고
죽리(竹里) 서쪽 밤섬은 모래톱이 갈라졌네.
발 아래 파도 소리 몸이 물에 뜬 것 같고
하늘가의 먼 들판에 눈앞이 아득하네.
강 언덕에 고운 봄빛 점차로 더해가니
그대들과 손잡고서 날마다 올 만하네.
陡立蠶頭渡口屹 登臨忽覺四山低
棠村樹老麻湖北 栗島洲分竹里西
波鳴坐下身疑泛 野迥天邊眼欲迷
江岸漸看春色好 與君日日可相携
윤기(尹愭),「양화나루 잠두봉에 올라 입에서 나오는 대로 읊어 함께 놀러 나온 사람들에게. 무자년(1768)에 짓다(登楊花渡蠶頭 口占贈同遊諸人 戊子)」
이 시는 윤기가 1768년 28세 때 쓴 것으로 잠두봉에서 보이는 경치를 쓴 것이다. 윤기는 양화진과 잠두봉에 대해 몇 편의 시를 더 남겼다. 잠두봉(蠶頭峯)은 양화나루 동쪽 강변에 우뚝 솟아 있는 누에머리 모양의 봉우리로 한강의 이름난 명승에 하나였다. 지금은 절두산이라는 섬뜩한 이름으로 불린다. 이곳에서는 마포며 밤섬 등이 시야에 들어오고, 강과 들판도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봄이면 더욱 좋아서 사람들과 오면 좋을 그런 곳이었다. 유득공도 잠두봉에 대해서 「양화도(楊花渡)」에서 “강가에 가파른 봉우리 푸르게 오뚝한데, 강위엔 묵은 안개 뽀얗게 자욱하네(江上峭峰碧兀兀 江間宿霧白濛濛)”라 하기도 했다.
조선 초기에는 중국 사신들이 이곳을 방문하고 배를 띄워 유람을 즐겼다. 이후에는 이지함(李之菡)과 박세채(朴世采) 등이 살기도 했고, 부유한 상인들도 적지 않게 거주했다. 그러나 을축년 대홍수(1925), 양화대교 건설(1965), 성산 토지구획정리사업과 강변북로 건설(1966), 밤섬 파괴(1968), 선유도 정수장 설치(1978), 당산철교 건설(1980) 등으로 양화진 주변은 옛날과는 크게 뒤바뀌었다. 지금은 절두산 순교성지, 외국인 묘지, 당인리 발전소, 양화대교, 당산철교, 강변북로, 선유도 공원, 한강 분수 등이 대신 자리 잡았다. 세월은 모든 것을 뒤바꿔 놓는다. 지금도 이곳을 사람들은 양화대교, 강변도로와 지하철을 통해 열심히 오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