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로 보는 한양’ 13

남산(南山), 꽃구경의 명소

by 박동욱

남산(南山), 꽃구경의 명소


남산은 목멱산(木覓山), 종남산(終南山), 인경산(引慶山), 열경산(列慶山), 남악(南嶽) 등으로 불려졌다. 서울을 대표하는 낙산, 북악산, 인왕산과 함께 4대 산으로 꼽혔다. 이곳에서 가뭄이 들면 기우제를 지냈고, 위급 상황이 되면 봉수대에 불을 밝혔다. 특히 남산의 봉수대는 전국의 봉화가 모이는 곳으로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었다.

남산은 꽃구경하기에 좋은 곳으로『열양세시기』에서 필운대, 세심대(洗心臺)와 함께 한양의 3대 꽃 놀이터로 들고 있다. 여러 문인들이 한양에서 가장 아름다운 10곳을 읊은 「한도십영(漢都十詠)」에는 ‘목멱산 꽃구경[木覓賞花]’이 꼭 한자리를 차지하곤 했다. 이뿐 아니라 정이오(鄭以吾)가「南山八詠」을 읊은 이후로 수많은 문인들이 남산을 노래했다.

남산은 이름난 문인들의 집과 정자가 많이 있는 곳이었다. 대표적인 곳으로는 조현명(趙顯命)의 귀록정(歸鹿亭), 조만영(趙萬永)의 노인정(老人亭), 이항복(李恒福)의 쌍회정(雙檜亭), 김육(金堉)의 재산루(在山樓), 강세황(姜世晃)의 홍엽루(紅葉樓), 심백원(沈百源)의 율정(栗亭) 등을 들 수 있다. 비숍(Bishop)은 1897년에 발간한『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Korea and Her Neighbours)에서, ‘아름다운 남산으로부터 산에 둘러싸인 서울이 가장 잘 보인다’고 했다. 이처럼 남산은 한양을 대표하는 랜드 마크여서 많은 기록이 남아 있다.


남산 봉수대.jpg


푸르고 푸르른 저 남산은

우주 사이에서 우뚝 솟았네.

남산에 올라가서 내려다보니

한강도 개천처럼 졸졸 흐르네.

蒼翠終南嶽 崔嵬宇宙間

登臨聊俯瞰 江漢細潺湲

최경창(崔慶昌), 「남산에 올라(登南岳)」


이 시는 최경창이 아홉 살 때 남산에 올라가서 느꼈던 감회를 적은 것이다. 남산의 정확한 높이는 270m로 서울에서도 작은 산에 속한다. 남산에 올라서 바라다보니 한강은 실개천처럼 작아 보였다. 어린 아이 특유의 감성이 인상적이다. 아이의 눈에는 남산도 어마어마한 높이로 느껴졌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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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푸른 솔숲 눈에 들어오는데

이런저런 봉우리에 온통 그늘 덮여있네.

어찌하면 패기를 푸르게 키워가며

천년토록 베여지지 않게 할 수 있을까

蒼蒼入目遠松林 牛背蠶頭萬蓋陰

安得長靑滋覇氣 千年不受斧斤侵

김창흡(金昌翕, 1653~1722), 「반계십육경(盤溪十六景)」중 「목멱송림(木覓松林)


이 시는 남산의 소나무 숲이 영원히 지켜지길 바라는 염원을 담고 있다. 남산의 소나무에 대해서는 이광려가 강세황의 집을 찾고서 쓴「豹菴宅」에도 “산마루 소나무는 천 그루 만 그루건만, 집문서엔 남산 아예 빠져 있다네.(嶺松千萬萬, 宅券無南山)라 하여 인상적으로 그려졌다. 애국가에도 ‘남산 위의 저 소나무’라는 가사가 들어가 있듯, 우리에게 남산 위에 있던 소나무는 각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소나무는 우리 삶과 밀접한 나무다. 금줄에다 솔가지를 끼우고, 솔가리로 군불을 땠다. 송기떡, 송엽주, 솔잎차 등 먹거리로도 즐겨 썼다. 그러다가 소나무 관에 몸을 누웠다. 그렇게 소나무는 탄생의 순간부터 죽음의 순간까지 함께 하는 그런 나무였다. 그 많던 남산의 소나무는 다 어디로 사라졌을까? 일제감정기 때 소나무는 벌목되었고 그 자리에 잡목들이 심어졌다. 김창흡의 바람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남산의 제일봉에 높은데 앉았으니

봄 경치 천만 겹 넓게도 펼쳐지네.

나무꾼의 도끼를 빌릴 수만 있다면

눈앞에 서너 그루 소나무 베내련만

高坐南山第一峯 煙花闊展萬千重

若爲借得樵夫斧 斫却面前三四松

윤기(尹愭), 「남산의 잠두봉에 올라[登南山蠶頭]」


이 시는 윤기가 1790년 50세 때 지은 것이다. 잠두봉(蠶頭峯)은 남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이다. 절두산으로 흔히 알려진 잠두봉(蠶頭峯)과는 같은 이름의 다른 장소이다. 유본예의 『한경지략(漢京識略)』에, “남산의 서쪽 봉우리 중에 바위가 깎아지른 곳이 누에머리(蠶頭) 모양이다”라고 나오는데, 이곳의 봄경치는 서울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였다. 그런데 우뚝한 서너 그루 소나무가 시야를 가리고 있어 상춘(賞春)에 방해가 되니, 이 짓궂은 방해꾼을 없애 버리고 싶다고 장난스레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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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속에서 구름 비단 들어내고

안개 속에 예쁜 단장 전하였다네.

어찌 소나무나 잣나무같이

얼음과 서리 속에 오만하게 홀로 섰나.

雪裏披雲錦 煙中傳艶粧

何如松柏樹 獨立傲氷霜

이달(李達),「남산의 동백꽃(南山冬柏)」


남산은 역시 꽃이 아름다운 곳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남산의 꽃을 다룬 시들이 많다. 동백꽃은 눈 속에서도 안개 속에서도 예쁜 자태는 여전하였다. 소나무와 잣나무는 눈과 서리를 견뎌내서 굳은 절개와 의지를 상징한다. 동백도 이들 나무와 다를 바 없이 겨울 추위를 견뎌내며 그렇게 서있었다. 남산의 꽃을 다룬 시 한 편을 더 살펴보자. 이덕무는 「남산의 국화(南山菊)」에서 “돌 밑으로 뻗어 나온 국화, 가지 꺾여 거꾸로 냇물에 노랗네. 시내 가서 물 움켜 마시려하니, 손에도 향기 나고 입에도 향기 나네.(菊花欹石底 枝折倒溪黃 臨溪掬水飮 手香口亦香)”라 하였다.




지금 남산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케이블카나 남산 돈가스 정도다. 그러나 남산은 많은 이야기를 간직한 곳이다. 남산은 꽃이 흐르러지게 피면 경치가 이루 말할 수 없이 아름다웠다. 어디 꽃뿐인가. 소나무도 진중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때 소나무는 베어졌고 신궁(神宮)이 세워졌다. 훗날에는 중앙정보부가 자리를 잡아 죄 없는 사람들을 잡아 들여 고문을 했던 것으로 악명 높았다. 아름다운 풍경이었지만 슬픈 사연을 담고 있는 곳, 바로 남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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