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구정(狎鷗亭), 더 이상 갈매기가 찾지 않는 정자
압구정(狎鷗亭), 더 이상 갈매기가 찾지 않는 정자
압구정(狎鷗亭)은 한명회(韓明澮, 1415∼1487)의 별서다. 압구란 이름은『열자』중에서 기심(機心)을 잊고 갈매기와 친압한다는 뜻에서 취한 것이다. 압구정은 원래 송나라 때 재상 한기(韓琦)의 서실 이름이었는데, 한명회가 자신의 공로를 한기에 견주어 이렇게 이름 붙였다. 원래는 여의도에 있었는데, 1476년 무렵 지금의 압구정동으로 옮겼다. 그동안 압구정의 주인은 참으로 많이 뒤바뀌었다.
압구정은 아름다운 곳으로 이름이 났다. 성해응(成海應)은『명오지(名塢志)』에서 “두모포(豆毛浦) 남쪽 기슭에 있다. 강물 빛이 비단 같았고, 강이 갈라져 섬을 만들었는데 흰 모래밭과 푸른 풀이 널찍하고 평원하여 한강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다.”라 하였고, 강준흠(姜浚欽)도 “우리나라 명승지의 기록을 모조리 훑어보더라도, 압구정 외에는 다시 정자가 없구나(閱盡東韓名勝記 狎鷗亭外更無亭)”라 하였다.
거친 덤불, 덩굴풀이 높은 언덕 뒤덮어서
아득히 당시를 생각하니 명승지임 알겠도다.
인간사 백 년이야 그 얼마나 되겠는가
강 가득한 봄 경치에 머리만 긁적이네.
荒榛蔓草蔽高丘 緬想當時辦勝遊
人事百年能幾許 滿江煙景入搔頭
기대승(奇大升), 「압구정(狎鷗亭)」
이제는 덤불과 풀이 가득하게 덮여 있어 그 옛날 풍류를 즐겼던 압구정인지 알 수가 없었다. 과거의 영화(榮華)와 현재의 전락(顚落)은 한 개인의 슬픈 역사를 떠올리는 동시에, 보편적인 인간 삶의 짙은 허무와 연결이 된다. 백 년도 못 살면서 구축한 권세(權勢)의 기억은 그렇게 풀 속에 숨을 죽이고 있었다. 강에는 봄 경치가 펼쳐져 있지만 복잡한 심경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1]
원림에서 풍악 소리로 은거 생활 즐겼으니
상국의 높은 풍류 이곳에서 찾았다네.
지금은 큰 공이 다 사라져 버렸으니
부질없이 일생을 수고해서 기심을 사용했네.
園林鍾皷樂冥沈 相國風流此地尋
勳業如今消得盡 漫勞身世費機心
[2]
생전에 우선 시중의 영화를 즐겼으니,
향기와 악취에 죽은 뒤 이름 싹 잊었네.
머리 돌려 노량의 강가를 바라보니
육신의 사당 위로 해와 별 빛이나네.
生前且樂侍中榮 芳臭渾忘身後名
回首露梁江際望 六臣廟上日星明
홍직필(洪直弼), 「압구정에서. 압구정은 바로 상당군 한명회의 옛 정자이다○두 수(狎鷗亭 亭卽韓上黨明澮舊墅○二首)」
정자의 이름은 구로망기(鷗鷺忘機)의 고사에서 나온 것이다. 한명회가 기심을 잊었다고는 했지만 실상 그의 삶은 기심을 잊어버린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때로는 어떤 명명법(命名法)은 자신의 삶과 전혀 다른 말을 하곤 한다. 그런 이름은 자신이 가고픈 길에 대해 말하는 것일까? 자신이 갔다고 믿은 길에 대해 말하는 것일까? 생전에 모든 영화를 누리면서 사후에 어떻게 사람들에게 평가되고 기억될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사육신과 한명회의 삶을 비교하면서 어떤 삶을 선택하고 살아야 하는지를 말하고 있다. 누군가에게 압구정은 부끄러운 삶의 대명사처럼 기억됐다.
두물의 좋은 경치 나라에서 최고라면
한명회 압구정은 오강(五江) 중에 최고이네.
초록 들판 긴 숲에는 안개가 자욱하고
푸른 물결 비치는 석양빛에 돛단배 몇 척.
산수(山水)가 사방에서 난간을 에웠지만
백 년 동안 비바람에 창이 성치 못하다네.
당시에 부귀한 이 흔적도 하나 없고
오늘 정자 오른 객의 발소리만 들려오네.
豆湖勝景冠吾邦 上黨高亭壓五江
綠野長林煙漠漠 蒼波斜照帆雙雙
水山四面縈回檻 風雨百年剝落窓
當時富貴人無跡 今日登臨客自跫
유금(柳琴),「압구정(押鷗亭)」
두호는 이천과 한강이 만나는 일대를 이르며, 지금의 동호대교 부근이다. 강변에 펼쳐진 풍경 중에서 압구정이 단연코 으뜸이었다. 사방으로 보이는 산수가 다 아름다웠지만 오랜 세월이 지나자 온전한 곳이 없었다. 그 옛날 부귀한 사람들이 분주히 왕래하던 흔적은 찾을 수가 없고, 다만 오늘 정자에 오르는 자신의 발소리만이 들려올 뿐이다.
푸른 버들 깊은 곳에 온갖 매미 우는 가을
남쪽 강가 맨 위쪽에 정자 한 채 서 있으니
속세 사람 진경 찾아 딴 세상에 왔더니만
주인은 벼슬 나서고 누대만 잠겨 있네.
비 온 흔적 여울 속 바위에서 처음 보고
사람 소리 달빛 아래 배에서는 희미한데
한밤중 물소리에 천고 감회 일어나니
아득하여 곧바로 갈매기에게 물으려네.
綠楊深處萬蟬秋 亭在南江上上頭
俗子尋眞來別界 主翁遊宦鎖名樓
雨痕初見灘中石 人語微聞月下舟
半夜水聲千古感 蒼茫直欲問沙鷗
한장석(韓章錫),「압구정(狎鷗亭)」
가을에 압구정을 찾아왔다. 속세 사람은 진경을 찾아서 압구정을 방문했지만 되레 주인은 벼슬살이하러 압구정을 떠났다. 인간은 자신이 있는 곳이 별천지란 것도 모르고서 다른 곳을 기웃댄다. 이 정자의 주인공도 마찬가지였다. 배에서 한밤중에 물결 소리가 들리자 정자에 얽힌 수많은 사연이 떠올려진다. 갈매기는 압구정을 다룬 시에서는 빠질 수 없는 클리세(Cliché)다. 갈매기에게 자신이 기심(機心)을 잊었는지를 묻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압구정은 유본예의『한경지략』과 서유구의『금화경독기(金華耕讀記)』에 기록이 보이지만 특별한 내용은 없다. 다만『금화경독기』에는 압구정의 위치에 대한 재미난 기록이 나온다. 압구정이 광주에 있었다는 설이 있었던 모양이다. 이것에 대해 지리지에 간혹 한명회의 압구정이 광주에 있다고 한 것은 고증하지 않아서 생긴 잘못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 글에서 언급하지 않았지만 압구정의 주인은 수없이 많이 바뀌었다. 한명회뿐 아니라 다른 압구정의 주인들도 불행한 운명을 맞은 경우가 여러 번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압구정을 보면서 인간사 영화(榮華)의 부질없음과 진정한 기심(機心)의 사라짐을 느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