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로 보는 한양’ 16

밤섬(栗島), 약초와 뽕나무의 섬

by 박동욱

밤섬(栗島), 약초와 뽕나무의 섬


밤섬은 율도(栗島), 율주(栗洲), 가산(駕山) 등으로 불렸다. 밤섬이란 이름은 밤처럼 두 쪽으로 갈라져 윗밤섬, 아랫밤섬으로 나뉘어 있던 옛 지형에서 유래되었다. 유본예의『한경지략』에는 “마포 남쪽에 있다. 약초를 재배하고 뽕나무를 심었다(栗島, 在麻浦南 蒔藥種桑)”라고 나온다. 이 섬은 약초와 뽕나무가 유명한 곳이었다. 성현(成俔)이「읍취당기(挹翠堂記)」에서 읍취정에서 바라다보이는 열 두 가지 아름다운 광경을 들고 있다. 그중 밤섬의 뽕나무를 일곱 번째 풍광으로 꼽기도 했다.

문인들은 밤섬의 여러 풍경을 노래했다. 이민구(李敏求)는「황록당 팔영(黃綠堂八詠)」의 하나로 ‘밤섬의 김매기 노래(栗島耘歌)’를 들었고, 이간(李柬)은「징심정십경(澄心亭十景)」의 하나로 ‘밤섬의 농사 구경(栗島觀稼)’를 들었으며, 서명응(徐命膺)은 「서호십경고금체(西湖十景古今體)」에서 ‘비내리는 밤섬의 밭갈이(栗嶼雨耕)’를 들었다. 조선 후기에는 밤섬이 활쏘기 터로 사용되기도 했다. 윤기는「탁영정 이십경(濯纓亭二十景)」의 하나로 ‘밤섬에서 활 쏘는 모습(栗島射侯)’을 들었다.

밤섬에서 오랫동안 거주했던 집안으로는 김씨와 판씨를 들 수 있다. 김씨에는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한 성녀 김효주, 김효임 자매가 밤섬의 부유한 집안의 출생이라는 기록이 있으며(한국교회사연구소 2004), 판씨는 고려말 때 귀양 온 이래 정주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밤섬의 판씨 가문에 의하면 당시 밤섬에 살고 있었던 사손(嗣孫) 판봉석(判鳳石)이 집안 대대로 세전(世傳)되어 오던 보첩(譜牒)을 보관하다가 1925년 대홍수(大洪水)로 밤섬 전역이 침수되었을 때 유실하였다고 한다.


밤섬 심사정 〈밤섬〉,18세기, 24.5×27.0cm,개인 소장.jpg 밤섬, 심사정




……

뱃사공이 밤섬 좋다 넌지시 일러주며

십 리라 백사장이 맑고도 호젓하다네.

구름은 어둑어둑 물빛은 뻗쳤는데

희미한 어둠 속에 내 낀 나무 빼곡하네.

……

舟人報道栗島好 白沙十里淸而幽

雲陰䤃䤁水光立 暝色熹微煙木稠

이행(李荇), 「잠두록 뒤에 쓰다(題蠶頭錄後)」


뱃사공은 밤섬을 지나다가 밤섬에 십 리 펼쳐진 백사장이 참 좋다 말을 한다. 그런데 보이는 것은 밤섬에 있는 빼곡한 나무들이 안개에 쌓인 풍경뿐이다. 이처럼 밤섬은 오래전부터 사람들에게 이름이 알려져 있던 곳이었다.



밤섬 지도.jpg





무릉도원 가는 것 못 정했으니

밤섬의 집 유달리 사랑했었네.

시끄러운 저자 소리 잠시 떠나니

강물은 섬 둘러서 자주 출렁대네.

나무꾼과 목동이 외딴 섬에 오기도 했고,

쟁기질과 밭갈이는 늘어난 모래 앞에서 멈추네.

모래톱에 내 바람대로 들어간다면,

천 이랑에 연꽃을 심을 것이네.

未卜桃源去 偏憐栗島家

市聲喧蹔隔 江面繞頻斜

樵牧通分嶼 耕犂限漲沙

中洲吾願入 千頃種荷花

이광려,「밤섬에서 노닐다(遊栗島)」


이 시는 이광려가 밤섬의 매력에 빠져서 살고 싶은 바람을 쓴 것이다. 무릉도원을 찾지 않고 밤섬을 유달리 좋아한다고 하는 것에서, 밤섬에 대한 깊은 애정을 느낄 수 있다. 밤섬은 저자와도 떨어져 있었는데, 한강이 에워싸 흐르고 있었다. 나무꾼과 목동은 이 섬을 왕래하였고, 농사꾼은 농사를 부지런히 짓고 있었다. 그는 이곳에 들어가 살게 된다면 밭에다 온통 연꽃을 심고 싶다고 하여 군자처럼 살고 싶다는 바람을 담았다.


밤섬 폭파 공사 1968 2월 10일.jpg 밤섬 공사현장




자욱한 안개에 포구는 아득한데

회 파는 배와 초가는 강남땅 풍경같네.

적선은 세상 뜨고 노래만 남았기에

밤섬의 꽃을 찾아올 수 있었다네.

羃羃輕煙浦望賖 鱠船茅屋浙人家

謫仙零落歌辭在 解道來尋栗島花

신위(申緯), 「밤섬(栗島)」


신위는 이광려에게 시를 배웠다. 이 시의 주에 보면, 이광려의「洗心亭次損仲韻」에 나오는 ‘羃羃輕烟浦望賖’ 구절과, 「三月二十七日 舟自三浦向杏洲」에 나오는 ‘鱠船苕霅客, 茅屋浙人家’ 구절과, 『이참봉집』에는 나오지 않는 ‘來尋栗島花’ 구절을 따와서 지은 것이라 나온다. 밤섬의 포구는 안개가 끼여 있는데 회 파는 배며 초가집은 모두 중국의 강남처럼 이국적이었다. 이광려를 적선(謫仙)에 빗대면서 스승이 세상을 떠난 아쉬움을 말했다. 스승이 살아생전 그렇게 좋아했던 밤섬에 스승이 세상을 떠나고 제자는 그렇게 찾아왔다. 스승에 대한 제자의 경모(敬慕)가 애틋하다.


밤섬 폭파 기사.png




백사장은 제비 꼬리처럼 갈라지고

외딴 섬은 까마귀머리처럼 떠 있네.

저녁에 사람은 고기잡이, 나무하는 일 말하는데,

가을에 마을은 갈대꽃에 깊어졌네.

밭에서는 이따금 조개를 캐고,

울타리 밑에서는 각자 배 대네.

지는 해가 큰 나무를 밝게 비추는데,

희미한 안개 저녁 물가에 모여드네.

平沙分燕尾 孤嶼汎烏頭

人語漁樵夕 村深蘆荻秋

田中時採蛤 籬下各停舟

落照明高木 踈烟集晩洲

김재찬(金載瓚), 「밤섬(栗島)」


밤섬의 모습이 잘 묘사된 시이다. 저녁에 사람들은 옹기종기 모여 고기잡이며 나무하는 일을 이야기하는데 마을은 갈대꽃이 웃자라 둘러싸고 있다. 밭에서는 조개를 캐고 배로는 물고기를 잡는다. 낙조와 안개는 밤섬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었다.




이곳은 얼음을 캐는 채빙업을 많이 하기도 했고, 배를 만드는 목수도 많이 살았다. 특히 경강선의 대부분은 이 섬에서 만들어졌다. 1968년 2월까지 62가구 443명의 주민이 살고 있었다. 여의도가 개발되면서 한강 물흐름을 좋게 하기 위해 이 섬은 폭파됐고, 원래 살던 주민들은 마포구 창전동 와우산 자락으로 집단이주해야 했다. 이재준 감독의 김씨표류기(2009)도 이 섬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오랜 세월이 지나 밤섬은 부활을 앞두고 있다. 밤섬의 면적이 자연스레 늘어나고 있고 철새들은 이곳을 찾아온 지 오래되었다. 인간의 이기심에 따라 폭발시켜 없앴던 섬은 폭발 전보다도 더 커졌다. 놀랍게도 스스로 복원하여 되살아났다. 언젠가 밤섬에도 예전처럼 사람들이 살날이 올지도 모를 일이다.


김씨표류기.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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