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심대(洗心臺), 정조가 그곳에서 아버지를 그리워하다
세심대(洗心臺), 정조가 그곳에서 아버지를 그리워하다
유본예의『한경지략』에 “인왕산 아래에 있다. 선희궁 뒤 돌벼랑에 ‘세심대’ 석 자가 새겨져 있다. 봄날 꽃구경하기에 적당하다. …… 정조 을묘년(정조 19, 1795) 꽃구경과 낚시를 하고 춘당대에서 잔치를 열었다. 임금께서 영성군이 지은 세심대 절구의 운자로 친히 시를 짓고, 연회에 참석한 여러 신하에게 화답시를 올리게 하여 이 해의 경사를 기록하였다.”라 나온다.
세심대의 위치는 어디였을까? 『정조실록』 1791년 3월 17일 기록을 보면, “선희궁 북쪽 동산 뒤로 100여 보 되는 곳에 있었다.(臺在宣禧宮北園後百餘步)”라고 나온다. 지금 국립맹학교 뒤편이다. 정조는 매년 3월에 경복궁 북서쪽에 있는 육상궁(毓祥宮)을 참배한 다음 근방에 있는 연호궁(延祜宮)과 선희궁에 참배하였다. 세심대에 올라 신하들과 함께 꽃구경, 시 짓기, 활쏘기 등을 하였다. 이곳은 사도세자의 사당인 경모궁(景慕宮)을 처음 세울 때 터를 잡았던 곳이기 때문이다. 정조가 세심대를 찾게 되면 복잡한 감정이 들 수밖에 없었다.
만 소나무 그늘져서 서쪽 기슭 짙푸른데
솔숲 사이 세심대가 사람 맘 맑게 하네.
좋은 자리 맛있는 술, 손님들 즐거운데
다시 금(琴)과 노래 있어 마주해 술 따르네.
원림이 난리 겪은 뒤에는 고요한데
밝은 달 전과 같이 고금을 비추누나
우리 집 삼대토록 같은 동리 살았는데
어느 날에 돌아가서 아무 나무 가리킬까.
西麓蒼蒼萬松陰 松間石臺淸人心
芳筵美酒娛賓客 復侑琴歌相對斟
園林寂寞喪亂後 明月依然照今古
吾家三世與同里 何日歸來指某樹
김상헌(金尙憲),「근가십영(近家十詠)」, ‘세심대(洗心臺)’
세심대(이향성 당시에는 洗心亭이라 불림.)는 이향성(李享成, 1524~1592)이 거처하던 곳으로 봄이면 살구꽃이 만발하고 맑은 샘이 콸콸 흐르는 아름다운 경관이었다. 저간의 사정이 심수경(沈守慶)의 『견한잡록(遣閑雜錄)』에 나온다. 후에 광해군이 이곳을 빼앗았다. 김상헌은 심양에서 자신의 집 근처의 명소 10곳을 읊으면서 세심대에 대해서도 시를 읊었다. 세심대는 당시부터도 유명한 명소였으니, 유래가 오래된 셈이다. 뒤에는 박윤원(朴胤源)이 세심대 집에서 살기도 했다. 박윤원은 당시의 기억을 떠올려 「세심대유거기(洗心臺幽居記)」를 썼다.
꽃 피는 봄의 계절 한가한 날에
세심대 올라 세속의 소란함 씻네.
두 산은 참으로 하나의 문이었고,
수많은 나무는 같은 동산에 있었네.
곱디 고운 하늘빛은 단정하였고,
끙끙대며 오르니 땅의 형세는 높네.
앉은 자리에 흰 머리 노인 많으니
내년에도 오늘처럼 술 한잔하세나
暇日芳春節 心臺洗俗喧
兩山眞一戶 千樹亦同園
豓豓天光靚 登登地勢尊
坐間多皓髮 來歲又今樽
정조(正祖), 「세심대(洗心臺)에 올라 꽃구경을 하면서 시를 입으로 바로 읊어서 신하들에게 보이고 여기에 화답하게 하면서 차[茗]가 끓을 때까지 다 짓기로 규정을 내리다 신해년[登洗心臺賞花 口占 示諸臣和之 以茗熟爲令 辛亥]
정조의 세심대 행은 1791년 3월17일, 1792년 3월20일, 1794년 3월13일, 1795년 3월7일에 이루어졌다. 정조가 세심대에서 시를 읊으면 신하들이 그 시의 운자에 따라 시를 짓곤 했다. 신하가 먼저 지은 시에 차운하여 정조가 시를 짓기도 했다. 아니면 박문수가 사도세자의 탄생을 축하하는 시에 군신들이 다 함께 차운시를 썼다. 다른 임금들이 세심대를 방문한 기록은 거의 찾아볼 수 없는데, 이유원의『임하필기』에 철종이 세심대에서 활쏘기를 즐겼다고 나온다.
이 시는 정조가 1791년에 지은 것이다. 특히 3, 4구는 유명하다. 여기서 두 산은 인왕산과 백악산을 가리킨다. 나란히 솟아 있는 두 산은 문처럼 보이고, 곳곳에 깔려 있는 많은 꽃나무는 같은 정원 안에 들어온 것처럼 느껴진다는 말이다. 정조의 웅대한 기상이 느껴지는 시구다. 동행한 노신들이 많았으므로 세심대 행을 내년에도 함께 할 것을 기약하는 것으로 시를 마쳤다.
열두 마리 용 깃발을 취타 행렬 따르니
오색구름 속에서는 온갖 꽃 춤추는 듯
고운 봄빛 해마다 끝없이 올 것이니
태평성대 군신들이 다 함께 즐긴다네
鳳吹行隨十二龍 萬花如舞五雲中
春光歲歲來無盡 壽域君臣樂事同
채제공(蔡濟恭), 「봄날 세심대에 올라 경치를 둘러보면서 지은 어제시에 받들어 화운하다 갑인년(1794, 정조18)(奉和御製春日洗心臺登眺韻 甲寅)」
이 시는 1794년 3월 13일에 정조가 세심대에 올라 시를 짓고 차운하게 하자 채제공이 쓴 것이다. 채제공은 당시 75세의 고령이어서 행차에 따라가지는 않고 77세인 영의정 홍낙성(洪樂性, 1718~1798)과 함께 종가(鍾街)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돌아오는 행차를 영접하였다. 내용은 특별할 것이 없이 태평성대를 오래도록 누릴 수 있기를 축수하고 있다. 다른 차운시들도 이와 비슷하거나 연회를 베풀어 준 성은에 감격해하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이렇게 군신들이 쓴 시들을 모아 축으로 만든 것을 갱재축(賡載軸)이라 하는데, 여러 개가 아직도 남아 있다.
정조에게 있어 아버지 사도세도는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이름이었다. 그가 대신들을 이끌고 세심대를 찾았던 것은 단순한 봄날 꽃놀이가 아니다. 정조 나름의 죽은 아버지에 대한 하나의 의식과도 다름없었다. 대신에게 죽은 아버지의 존재를 다시금 각성시키고 싶었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게 떳떳하게 보위(寶位)에 올라 수많은 대신들을 거느리고 있는 자랑스러운 아들의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을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