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균관(成均館), 조선 엘리트의 산실
성균관(成均館), 조선 엘리트의 산실
조선의 성균관은 1395년부터 3년여의 공사 끝에 1398년 현재의 종로구 명륜동에 위치하게 되었다. 성균관 유생의 정원은 유동적이었다. 개국 초에는 150명이었으나, 왜란이 끝난 뒤에 75명으로 줄었다가, 영조 때에는 126명에 이르렀다. 유생의 구성은 상재생(上齋生)과 하재생(下齋生)으로 이루어졌다. 상재생(上齋生)은 생원(生員)과 진사(進士)로서 입학한 정규 학생이었으며, 하재생(下齋生)은 아버지나 할아버지의 도움으로 선발된 학생이었다. 일체의 비용을 국가에서 제공받는 혜택을 입었다. 유생들은 ‘제사’와 ‘교육’이 주된 의무이며 책임이었는데 제사는 대성전에서 교육은 명륜당에서 각각 이루어졌다.
윤기의「반중잡영(泮中雜詠)」220수는 성균관 생활을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다. 그는 과거에 급제한 뒤에 성균관 유생이었던 젊은 시절을 회고하며 시를 남겼다. 과거 시험을 목표로 치열하게 성균관에서 공부했던 유생들은 어떻게 생활하였을까?
[21]
약방의 창밖 높게 매달려 있는 북을
매일 새벽 밝아질 때 둥둥둥 울려대네.
“일어나시오!” 한마디 끝나기 무섭게도
“세수하시오!” 외침 다시 양재(兩齋)에 전해지네.
藥房窓外鼓高懸 每日鼕鼕欲曙天
起寢一聲纔罷後 更呼洗水兩齋傳
성균관에서의 생활은 엄격한 질서와 규칙을 요구받아 속된 말로 군기가 셌다. 약방(藥房)은 동재(東齋)의 맨 윗방 이름이다. 약방에 매달려 있는 북을 치는 것으로 하루가 시작되었으니 군대의 기상나팔인 셈이었다. 기상과 세면을 알리는 구호와 함께 일사분란하게 행동들이 이루어졌다. 의관을 갖춘 유생들은 식당으로 이동한다. 생원은 동쪽 문으로 들어가고 진사는 서쪽 문으로 들어가서 연령별로 마루에 올라가서는 서로 마주보며 앉았다. 아침저녁으로 식당에 가야하는데, 이것이 일종의 출석체크인 셈이었다. 아침저녁 식사에 연달아 출석하면 1점을 부여받았으니, 이 점수를 원점(圓點)이라 부른다. 모두 300점을 획득해야 비로소 과거시험의 응시자격을 부여받게 된다.
[28]
음식들 다 차리고 “드십시오!” 외치면
일제히 수저 드니 마치 서로 기다린 듯
“물 올립니다!” “상 물립니다!” 차례로 외치고
“자리에서 일어서시오!” 한마디에 다함께 내려오네.
每物旣供勸飯呼 齊持匙箸若相須
進水退床次第唱 一聲起坐下來俱
식사를 시작될 때부터 마칠 때까지 구령에 따라 진행되었다. 식당 예절은 매우 엄격해서 부채질도 함부로 할 수 없었다. 식사할 때 반장(泮長, 성균관대사성)이 들어와서 식당의 모든 곳을 둘러보기도 했다. 그렇지만 간혹 별식이 나와서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삼복 때마다 초복에는 개고기나 삼계탕을, 중복에는 참외를, 말복에는 수박을 각각 제공받았다.
[53]
재사에 거처하던 유생이 죽게 되면
상 치러주고 운구하니 의식이 아름답네.
조문하는 유생들은 부조를 하였으니
한 솥 밥 먹은 후의 범상치 않았다네.
或値齋儒有死亡 治喪返柩燦條章
會弔諸生仍賻助 同齋厚誼不尋常
성균관은 유생들의 당색(黨色)에 따라 끼리끼리 뭉치는 성향이 강했다. 오죽하면 사용하던 방까지도 당색에 따라 달리했다. 그렇지만 죽음에 있어서는 예외였다. 동고동락하면서 지내던 사이였기 때문에 다른 유생의 죽음은 묵직한 느낌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들은 죽은 유생을 위해 상을 치러주고 본가로 운구해 주었으며, 조문을 마치고 부조를 했다. 누군가가 끝내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게 되면, 남아 있는 유생들은 인간적인 연민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198]
알성하는 급제자들 반촌을 빛내는 날
식당 도는 옛날 전통 지금도 남아 있네.
머리에 계화(桂花)에다 손에는 상아 홀 들고 문에 가득 들어가
동쪽 서쪽 위아래 대청을 두루 도네.
謁聖新恩耀泮村 巡堂舊例尙猶存
桂花象笏盈門入 繞遍東西上下軒
입학 기준은 엄격했지만 졸업 기준은 따로 있지 않았다. 과거에 급제하면 그제야 성균관을 나갈 수 있었다. 오래도록 꿈꾸었던 급제의 날이 오면 명예로운 행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합격자는 옷을 갖춰 입고 식당을 쭉 한 바퀴 돌았다. 아직 합격하지 않은 사람들은 그들의 합격을 부러워하면서, 자신도 미래에 올지도 모를 그런 시간을 그려보곤 했을 것이다.
유생들은 엄격한 출석평가와 학력평가를 받았다. 그렇지만 장기나 바둑과 같은 오락은 결코 허용되지 않았다. 여러모로 팍팍한 삶이었다. 그래도 사회참여에 열심이어서 총96회나 시위를 하였다고 한다. 공부를 하는 몸이었지만 사회의 현안을 외면하지는 않았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수험생은 고단하다. 무엇보다 언제 합격할지 모를 막막한 희망과의 싸움이 가장 견디기 어려웠을 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