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표교(水標橋), 검서관들 다리에서 시를 짓다
수표교(水標橋), 검서관들 다리에서 시를 짓다
유본예의『한경지략』에는 “수표교는 중부(中部) 장통방(長通坊)에 있다. 다리 서쪽에 표석(標石)을 세우고 척(尺)과 촌(寸)의 눈금을 새겨 수심을 조사했다. 또, 경진수평(庚辰水平) 네 글자를 새겼다. 이 표석이 지금 이미 허물어졌으므로 새 돌로 다시 세웠다.”라 나온다.
조선 초 수표교를 처음 세울 때에는 소와 말을 사고 파는 마전 옆에 있었기 때문에 마전교(馬廛橋)라 불렸다. 수표교는 세종 23년(1441) 수표 설치 후 불리기 시작한 이름이다. 한양 개천에 놓여 있던 다리 중에 유일하게 원형을 보존하고 있다. 복개공사 때 장춘단 공원으로 옮겼다가 현재는 세종대왕 기념관에 자리잡았다.
수표교 주변은 종로 거리와 시전(市廛)이 인접해 있었다. 약방거리인 혜민서(惠民署)골이 가까이에 있었고 청나라 상인(商人)들의 삶터가 자리 잡았다. 영희전(永禧殿)을 향하는 어가(御駕)가 이곳을 지났고 다리 밟기가 이곳에서 성행했다. 이뿐 아니라 유명 인사들이 이 다리 근처에서 살았다. 천주교회 창립에 기여한 이벽(李檗)의 집이 근처에 있었고, 백탑파(白塔派)들이 이 다리 주변에서 교유를 이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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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랫길엔 분주하게 거마들 지나가고
저자엔 예사롭게 닭과 돼지 흩어져 있네.
아들 손자 낳으면서 저마다 편히 사니
이 모두가 영조께서 물길 트신 은혜로다.
해마다 삼월이면 물길을 손질하니
수많은 가래와 삽 모랫벌에 분주하네.
손수레로 실어 동쪽 성에 산처럼 쌓았으니
제방 버들 푸르게 마을에 날리었네.
동문(東門)에는 상춘객들 끝없이 이어져도
그 누가 크신 공적 술통까지 이르는 걸 알랴?
沙路繽紛度車馬 湫市尋常散雞豚
生子生孫各按堵 盡是元陵䟽導恩
每年三月修水政 萬鍤千鍬繞沙喧
輦向東城積如山 大堤楊柳綠搖村
靑門絡繹游春者 誰識洪功到酒樽
강준흠(姜浚欽), 「수표교(水標橋)」
위의 시에 네 구까지는 백성들의 평화로운 삶의 모습을 담담하게 그리고 있다. 이러한 평화로운 삶이 가능한 이유는 청계천의 준설(濬渫) 때문에 홍수가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다음 네 구는 분주한 준설의 모습과 제방에서 버들가지가 날리는 풍경을 제시했다. 마지막 두 구에서는 이 모든 것이 영조(英祖)의 공덕이었음을 분명히 밝혔다. 영조는 1773년에 돌 제방을 만들었고, 1760년에 준천사(濬川司)를 두어 매년 준설하였다.
모자에 바람 스며 술기운 사라지니
이어진 흰 그림자 바로 긴 다리구나.
홀연히 싸늘하게 물가 기운 일어나니
시든 버들에 안개 서리, 가깝고도 먼 것 같네
煖帽風穿酒力消 迤迤白影是長橋
凄迷忽作汀洲勢 衰柳煙霜近似遙
이덕무(李德懋), 「수표교(水標橋)」 6수 중 세 번째 수
모자에 바람이 스며들자 술이 확 깨며, 다리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갑자기 물가의 싸늘한 기운이 느껴지면서 안개와 서리가 낀 시든 버들이 먼 듯 가까운 듯 그렇게 보인다. 취중에 보이는 수표교의 느낌을 몽환적으로 그리고 있다.
저물녘 뿌연 안개 담담히 사라질 쯤
무지개 같은 제오교 희미하게 보이누나.
다리 위 행인들을 비록 알지 못하지만,
다시금 고개 돌려 아득히 바라보네.
向昬烟色澹將消 微辨如虹第五橋
橋上行人雖未識 更堪回首望遙遙
유득공(柳得恭), 「수표교(水標橋)」 4수 중 세 번 째 수
수표교는 안개에 자주 잠겨 있어서 쉽사리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제오교(第五橋)는 장안 남쪽 위곡(韋曲) 부근의 명승으로 여기서는 수표교를 가리킨다. 다리 위에는 모르는 사람들이 지나가고 있지만 고개 돌려 멀찍이 사라져 갈 때까지 바라본다. 혹시 아는 사람을 못 알아보고 그냥 스쳐 지나가지는 알았을까?
한 낮의 다리 끝에 물빛도 고운데
흰 거위, 비오리가 그 중 가장 어여쁘네.
난간의 아래에서 전부다 멱 감고서
엷은 그늘 찾아 들어 한숨 낮잠 즐기었네.
日午橋頭水色鮮 雪鵝花鴨最嫣嫣
齊齊浴羅欄干下 盡擇輕陰一餉眠
이서구(李書九), 「수표교에서 백탑 시사의 사람들과 절구를 짓다(水標橋同白塔詩社諸人作絶句三首)」 3수 중 두 번째 시
다리 아래 흐르는 물빛도 곱고, 거위와 오리는 더더욱 어여쁘다. 새들은 물에서 멱을 감은 뒤 그늘을 찾아서 잠을 청한다. 그림같이 아름답고 평화로운 풍경이다. 이덕무, 유득공, 이서구는 각자 수표교에 대해 시를 썼는데 3인3색의 면모를 보여준다. 이 시들은『한객건연집(韓客巾衍集)』에 실려 있다. 웬일인지 박제가는 수표교에 대한 시를 남기지 않았다.
수표교는 다른 작품들에서도 여러 번 등장한다. 허균의「장생전(蔣生傳)」에 나오는 장생은 수표교 다리 위에서 죽었다. 권상신(權常愼)의「수교변명수교설(水橋變名睡覺說)」도 수표교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박지원의「광문자전(廣文子傳)」에는 거지아이들이 병든 아이의 시신을 수표교 다리 아래에다 던지자 광문이 수습해서 공동묘지에 묻어주는 이야기가 나온다. 또, 박지원은 「취하여 운종교(雲從橋)를 거닌 기록(醉踏雲從橋記)」에서 운종교를 거닐다가 수표교에 도착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글에서 수표교의 정경이 참으로 아름답게 그려졌다. 백탑파들은 수표교 주위에 모여 살면서 어울려 다녔다. 조선시대 가장 독창적인 시와 문장들이 그들의 손에서 나왔다. 수표교에서 신분과 연령도 뛰어넘은 아름다운 만남이 그렇게 이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