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왕묘(關王廟), 삼국지 관우가 신앙이 되다
관왕묘(關王廟), 삼국지 관우가 신앙이 되다
서울에는 5개의 관왕묘가 있었다. 첫째는 남대문 밖 남묘(南廟)[소위 생관왕묘(生關王廟)], 둘째는 동대문 밖 동묘[소위 사관왕묘(死關王廟)], 셋째는 서대문 밖 서묘, 넷째는 혜화문 안[옛 송동(宋洞)] 북묘, 다섯째는 종로 보신각(普信閣)에 부속된 묘다.
유본예의 『한경지략』에는 남관왕묘(南關王廟)와 동관왕묘(東關王廟)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먼저 남관왕묘에 대해서는 “숭례문 밖에 있다. 선조 무술년(1598)에 명나라 장수 진린이 사당을 세웠다(南關王廟, 在崇禮門外, 宣祖戊戌天將陳寅建祠)”라고 했고, 동관왕묘에 대해서 “홍인문 밖에 있다. 명나라 조정에서 무신(撫臣) 만세덕(萬世德)에게 명하여 사당을 세웠다(東關王廟, 在興仁門外, 中朝命撫臣萬世德立廟)”라 했다.
제일 먼저 남묘가 들어섰다. 그 후 1601년에 동묘가, 1885년에 북묘(지금의 서울과학고 남쪽 자리)가, 1902년에 서묘가 각각 건립되었다. 지금은 동묘와 남묘만이 남아 있다. 남원, 고금도, 안동 등 지방 곳곳에도 관왕묘가 있었다.
관왕묘에 대한 일제 강점기 때 기록도 있다. “동소문 안 보성고보교(普成高普校)는 전날 북관왕묘터다. 서대문 밖 제생원 양육부(養育部)의 맹아부(盲啞部)는 옛날 서관왕묘 자리다. 종로에 있던 관왕묘는 시전(市廛)의 사람들이 소규모로 만든 것으로, 일반 사람들은 잘 알지도 못하는 것이다.”
낡은 사당 으슥하여 대낮에도 싸늘한데
의젓한 관우 초상 한의 의관 입었다네.
당시에 중원 사업 마치지 못해선지
적토마가 천년 동안 안장 벗지 않았다네.
古廟幽深白日寒 儼然遺像漢衣冠
當時未了中原事 赤兎千年不解鞍
이단전, 「관왕묘(關王廟)」
이 시는 윤행임(尹行恁)의 『방시한집(方是閒輯)』 등 많은 선집에 수록되었다. 이응수(李應洙)가 편찬한 『김립시집(金笠詩集)』이 김삿갓 시집 중에서 선본으로 인정되는데 여기에는 무슨 까닭에서인지 위의 시가 김삿갓의 작품으로 수록되어 있다.
오래된 사당이라 영험함이 깃들여 있는지 대낮에도 서늘한 기운이 감돈다. 거기에는 관우와 적토마가 함께 그려진 초상이 있었던 모양이다. 관우는 한나라의 의관을 차려 입고, 적토마는 안장을 얹힌 모습이었다. 안장이 얹힌 적토마의 모습을 통해 한(漢)나라의 부흥을 이루지 못하고 여몽(吕蒙)에게 죽임을 당한 사실을 상기시켰다. 이단전의 천재적인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준 작품이다.
재주가 소식(蘇軾)과 황정견(黃庭堅) 따라잡기 충분하더라도
관우(關羽)가 과거 급제를 정해주진 못할 것이네.
더구나 나는 한 자루의 붓도 멀쩡한데
어찌 저 하늘을 감동시킬 수 있겠는가.
假令才足追蘇黃 未必關公自主張
況我一毫猶不盡 安能感格彼蒼蒼
윤기(尹愭), 「꿈속에서 과거 시험 날짜가 다가오자 관왕묘에 가서 기도를 드리려고 하는 사람에게 내가 시를 지어 주었다. 잠 깬 뒤에 두세 글자가 분명치 않으므로 뜻에 맞게 보충하였다.(夢有人臨科 將禱關廟 余贈以詩 覺後有數三字未詳者 以意補之)」
이 시는 1791년 초가을 윤기의 나이 51세 때 쓴 것이다. 관우 사당은 여러모로 영험한 기운이 있었던 것 같다. 병에 시달린 사람도 치료를 하기 위해 찾았고, 과거시험을 목전에 둔 수험생도 합격을 염원하기 위해 찾았다. 재주가 소식이나 황정견 같은 대단한 문인들이라 하더라고 합격 여부는 관우가 어떻게 도움을 줄 수 없다고 했다. 오직 관건은 붓이 모지라져서 쓸 수 없을 정도의 노력을 해야 하늘을 감동시킬 수 있고 그래야 자연스럽게 합격을 할 수가 있다. 공연히 노력도 하지 않고 관우 사당에 찾아와서 합격 해달라고 기도하는 풍조를 꼬집고 있다.
사당의 휘장 문은 엄숙도 한데
다가서서 엿보니 바람이 부네.
초상화에 귀신이 서려 있는데
보는 이의 눈물은 고금이 같네.
유심(劉諶)은 항복을 부끄러워했고
제갈량(諸葛亮)은 나랏일에 몸을 바쳤네.
충성이며 절개가 모두 같으니
두 분도 사당에 함께 모셔야 하리.
廟貌森帷戶 窺臨颯有風
丹靑神鬼接 涕淚古今同
北地羞銜璧 南陽效鞠躬
忠貞恨一槩 合此並幽宮
김창협(金昌協), 「관왕묘(關王廟)에서 자익의 시에 차운하다(關王廟 次子益韻)」
관왕묘에 들어서면 예사롭지 않은 기운을 느끼곤 했다. 초상화를 보면 예나 지금이나 보는 사람마다 관우의 충정을 생각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그러면서 북지왕 유심과 제갈량 두 사람을 꼽았다. 북지왕 유심은 촉한의 유선(劉禪)이 등애에게 항복하려 하자 배수진을 치고 사직을 위해 힘써 싸우다가 함께 죽어야 하다고 간언하였다. 그러나 유선이 받아들이지 않자, 유심은 소열황제(昭烈皇帝) 유비(劉備)의 사당에 곡하고서 먼저 처자를 죽인 뒤에 자살하였다. 또, 제갈량의「후출사표(後出師表)」에는 “몸을 굽히고 수고로움을 다하여〔鞠躬盡瘁〕 죽은 뒤에야 그만둘 것입니다.”라는 구절이 있다. 시의 말미에서는 유심이나 제갈량도 나라를 위한 충정에 있어서는 관우에 못할 것이 없으니 사당에다 함께 모셔야 한다고 했다. 중국의 양징(楊澄)이란 사람이 이 시를 보고 칭찬했다는 이야기가 이덕무의『청장관전서』에 나온다.
『삼국지연의』가 실칠허삼(實七虛三, 실제는 70%이고 거짓이 30%)이라면 관우는 실이허팔(實二虛八, 실제는 20%이고 거짓이 80%)이라고 할 정도로 관우에 대해서는 꾸며낸 이야기가 많다. 어찌 되었든 관우는 우리에게 의리와 충성의 상징으로 기억된다. 그러면서 종교의 대상으로까지 격상되기도 했다. 지금도 지하철 6호선을 타면 동묘에 갈 수 있고 관우를 만나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