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 난리 뒤에 봄 경치를 바라보다[亂後弼雲春望], 이호민(李好閔)
93. 난리 뒤에 봄 경치를 바라보다[亂後弼雲春望], 이호민(李好閔, 1553~1634)
꽃피울 나무 없는 황량한 성곽에는
저물녘 봄바람에 까마귀만 내려앉네.
옛 궁궐 가는 길엔 냉이가 파릇한데
봄 오니 늙은 농부 금비녀 줍는다네.
荒城無樹可花開 唯有東風落暮鴉
薺苨靑靑故宮路 春來耕叟得金叉
[평설]
유득공은 『경도잡지』에서 한양의 명승지 다섯 군데 중 한 곳으로 필운대를 꼽았다. 김매순도 『열양세시기』에서 인왕산 세심대(洗心臺), 남산 잠두봉과 함께 한양의 3대 꽃놀이 터로 들고 있다. 그러나 병화(兵禍)가 휩쓸고 지나간 땅에는 나무 하나 성한 것이 없었다. 봄이 왔어도 까마귀만 찾아와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을씨년스럽기 짝이 없다. 그래도 길가에 자라고 있는 냉이만이 새로운 시작을 알려주는 듯하다. 늙은 농부는 밭을 갈다가 금비녀를 주웠다. 피난길에 달아나던 어떤 여인의 것이리라. 땅속 깊이 숨겨져 있는 듯한 상처는 이렇게 예고 없이 모습을 드러내곤 했다. 꽃놀이 터에 꽃은 모두 사라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