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곡(李穀),「순욱(荀彧)」
37. 관중보다 훌륭했던 순욱
曹氏陰謀政似新(조씨음모정사신) 조조의 음모는 왕망의 찬탈과 다름없건만,
贊成皆是漢家臣(찬성개시한가신) 돕던 이들 모두가 한나라 신하였네.
荀侯豈爲浮名死(순후기위부명사) 순욱이 어찌 헛된 명성 위해 죽었으랴
忠義多於管仲仁(충의다어관중인) 그의 충의야말로 관중의 어짊보다 뛰어나니.
이곡(李穀),「순욱(荀彧)」
[평설]
이 시는 순욱(荀彧)을 기리며 지은 것이다. 왕망은 황제를 시해하고 스스로 황제가 되어 신(新)나라를 개국한 인물이다. 조조(曹操)의 권력 장악을 왕망(王莽)에 빗댔다. 조조 밑에 있던 신하들은 한나라에 충성을 다한 것이지, 조조에게 충성을 다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여러 대신이 조조의 공훈을 고려하여 승상(丞相)의 신분으로 국공(國公)의 작위를 지니게 하고 구석(九錫)의 특례를 더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조조가 이 일에 대해서 순욱의 의견을 묻자, 순욱은 반대의 의견을 분명히 밝혔다. 이 일로 인해 순욱은 내쳐졌다.
순욱의 죽음을 두고는 여러 설이 분분하다. 『삼국지』 배송지 주에는 조조가 유수(濡須)로 진격했을 적에 순욱이 병으로 수춘(壽春)에 남아 있다가 울화병에 걸려 죽었다고 나오고,『후한서』「순욱열전」에는, 조조가 보낸 음식물의 뚜껑을 열어보니 빈 그릇이었으므로 순욱이 음독자살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어쨌든 순욱은 조조의 의견에 반하는 행동을 하다 죽었다. 그는 헛된 명성을 위해 죽은 것이 아니라 신념과 충의를 지키기 위해 스러져간 것이다.
관중은 처음 섬겼던 공자 규(公子糾)와 함께 죽지 않고 후에 환공(桓公)이 된 소백(小伯)을 섬겼다. 공자의 제자들은 관중의 실절(失節)을 문제 삼았으나, 공자는 오히려 그의 공덕을 기렸다. 특히 환공이 제후를 규합하는 데 무력을 쓰지 않은 것을 관중의 공으로 평가했다. 하지만 관중이 목숨을 아꼈다면 순욱은 목숨을 바쳤으니, 그의 충의가 더욱 빛나는 것이다.
자신이 모시는 사람이 그릇된 선택을 할 때 아랫사람의 올바른 처신은 무엇일까? 충의와 타협 사이에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이 시는 이런 묵직한 질문들을 독자에게 던져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