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한(楚漢)의 영웅 한시로 만나다 88

남용익(南龍翼),「詠史」, 范增

by 박동욱

88. 어느 때 떠나야 했을까?

宋義誅時歸太早(송의주시귀태조) 송의가 죽었을 땐 너무 일찍 돌아간 것일 테고

陳平間後去還遲(진평간후거환지) 진평이 반간계 뒤 떠나기 늦었으리니,

吾家所立沈江日(오가소립침강일) 우리가 세웠던 회왕 강물에 잠기던 날에

碎首爭宜去亦宜(쇄수쟁의거역의) 목숨 바쳐 다투다가 떠났어야 했으리라.

남용익(南龍翼),「詠史」, 范增


[평설]

이 시는 범증이 항우를 떠날 시기에 대해 말한 것이다. 옛날부터 범증이 항우를 떠나야 할 때를 두고 말들이 많았다. 그렇다면 범증은 언제 항우를 떠났어야 했을까?

송의(宋義, ?~기원전 207)는 초 회왕(楚懷王)이 진나라에 포위된 조(趙)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상장군(上將軍)으로 임명한 인물이다. 초 회왕은 항우를 차장(次將)으로, 범증을 말장(末將)으로 삼아 20만 대군을 보냈다. 그러나 송의가 안양(安陽)에 이르러서도 진군하지 않고 지체하자, 이에 불만을 품은 항우가 왕명을 위조하여 송의를 죽이고 스스로 상장군이 되었다. 만약 범증이 이때 떠났다면 그것은 너무 이른 시기였을 것이다.

형양(滎陽)에서 항우가 유방을 공격할 때, 유방은 진평(陳平)의 반간계로 항우가 범증을 의심하게 만들었다. 항우의 의심을 받자 범증은 분노하여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며 항우 곁을 떠났고, 팽성(彭城) 근처에 이르러 등창으로 죽었다. 범증이 이때 떠났다면 이미 너무 늦은 시기였다.

시인이 보는 범증의 적절한 이별 시기는 의제가 강물에 빠져 죽었을 때였다. 의제는 회왕에서 황제로 높여졌으나, 항우의 밀명을 받은 영포(英布)에 의해 강물에서 격살(擊殺)당했다. 3구의 '吾家所立'은 항우가 "회왕은 우리 집안에서 세운 것일 뿐이다"라고 했던 말에서 따온 것이다. 자신들이 세운 군주를 스스로 살해한 이 순간이야말로 범증이 떠났어야 할 결정적 시점이었다.

사람의 관계는 영원하지 않다. 그래서 사람과 관계를 끊는 시기는 매우 중요하다. 그 시기가 너무 빨라도 너무 늦어도 곤란하다. 적절한 시기에 떠나야 그동안 맺었던 인연도 덜 손상되는 법이다. 범증은 그 시기를 잘 몰라서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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