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1. 잊혀진다는 것[詠忘], 이규보
세상 사람 모두다 나를 잊으니
세상에서 이 한 몸 외로웁구나.
어찌 세상만 나를 잊었겠는가
형제들도 모두 날 잊어버렸네.
오늘은 마누라가 나를 잊었고
내일이면 내가 날 잊을 것이니
그 뒤로는 온 세상 사이에서는
친한 이, 안 친한 이 싹 사라지리.
世人皆忘我 四海一身孤
豈唯世忘我 兄弟亦忘予
今日婦忘我 明日吾忘吾
却後天地內 了無親與疏
[평설]
영화 코코에는“살아있는 사람들이 그 사람을 기억하고 그에 대해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사라져 버려”라는 명대사가 나온다. 사람들에게 잊힌다는 것은 존재의 소멸과도 같은 공포다.
이 시는 잊힌다는 것의 본질을 깊이 있게 들여다본다.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진다는 것은 존재 자체가 지워지는 것과도 같은 두려움이다. 시인은 이러한 공포를 세상 사람들에서 시작해 형제, 그리고 마침내 아내에게까지 잊히는 과정으로 그려낸다.
그러나 시의 마지막에서 놀라운 전환이 일어난다. '내가 나를 잊는다'라는 선언을 통해 잊힘의 공포를 역설적으로 극복하는 것이다. 이는 고독의 극한에서 찾아낸 해방의 방식이라 할 수 있다. 나를 잊는 순간 친하고 낯섦의 구분도, 모든 관계의 의미도 사라져버린다. 잊힘을 두려워하던 존재가 마침내 잊힘마저 초월하는 경지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