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한(楚漢)의 영웅 한시로 만나다 120

주세붕(周世鵬), 「讀叔孫通傳」

by 박동욱

원칙과 타협의 딜레마

茫茫大道寓殘經(망망대도우잔경)  끝없는 큰 도는 해진 경전에 남았지만

萬古同天是性情(만고동천시성정)  오랜 세월 가도 하늘과 같은 것은 성정 뿐이었네.

堪笑當年綿蕝禮(감소당년면체례)  그 때 띠풀로 예법을 삼은 것이 우습다 하나

誰憐虛老魯諸生(수련허로노제생)  그 누가 헛되이 늙은 노나라 유생들 불쌍타 하랴.

주세붕(周世鵬), 「讀叔孫通傳」


[평설]

이 시는 현실주의 정치가 숙손통(叔孫通)과 원칙을 고수한 노(魯)나라 유생들 간의 충돌을 다룬다. 1구는 공자 이후 유교 이상이 제도화되지 못한 채 경전 속에만 남은 현실을 말한다. 유교의 큰 도는 본래 ‘정치와 도덕의 일치’를 지향했으나, 현실에서는 공허한 관념으로 전락했다. 2구의 ‘성정’은 형식과 제도 이전의 도덕적 감수성과 윤리적 직관을 가리킨다. 이는 공자가 말하는 인(仁)의 복원으로 읽히며, 현실 정치에서 예(禮)가 무너진 자리에 성정이 유일한 보루임을 강조한다.

3구에서는 실용적 타협을 말한다. ‘면체례(綿蕝禮)’는 숙손통이 한고조를 위해 새끼줄로 줄을 치고 띠풀로 자리를 표시하며 임시로 만든 예법이다. 이러한 제도를 우습다고 비웃음으로써 당시 유생들이 느꼈을 현실적 모욕감과 권력에 순응한 유교의 타락을 신랄하게 풍자했다.

4구에서 노나라의 유생들은 끝내 원칙을 지켰지만 현실 정치에서는 소외된 사실을 말한다. 숙손통이 예악(禮樂)을 제정하기 위해 노나라의 유생(儒生) 30여 명을 초빙했을 때, 두 유생만이 “옛 도에 합치하지 않는다”라며 거부한 뒤 은거했다. 그러나 이들은 현실 정치에서 무력한 이상주의로 남고 말았다.

이 시는 노나라 유생들의 원칙주의와 숙손통의 유교 정치화도 함께 비판하고 있다. 주세붕은 이 양자가 모두 실패했다고 보았다. 숙손통의 현실주의는 유가의 신성성을 훼손했고, 노나라 유생들은 원칙만을 고수하다 현실과 동떨어졌다. 따라서 도(道)도, 경(經)도, 예(禮)도 모두 일종의 허상임을 역설한다. 이를 통해 권력에 종속된 도덕의 변질과 현실성 없는 이상의 무력함을 동시에 경고하였다. 과도한 이상론과 현실론도 한계가 있으니, 결국 인간 내면의 윤리성만이 유일한 해답이 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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