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순(朴泰淳), 「서한연의속설 권두에 쓰다[題西漢演義俗說卷首]」
스스로 무너뜨린 패업
謀臣死後覇圖摧(모신사후패도최) 모신이 죽은 뒤에 패업도 무너졌으니
八載紛爭事可咍(팔재분쟁사가해) 팔 년간 다툰 일들 어이없기만 하네.
不是漢金能售詐(불시한금능수사) 한나라 황금이 계략을 이룬 것 아니라
重瞳天性本多猜(중동천성본다시) 겹눈동자 타고난 성품 의심이 지나쳤네.
박태순(朴泰淳), 「서한연의속설 권두에 쓰다[題西漢演義俗說卷首]」
[평설]
이 시는 항우의 패망을 외부적 요인이 아닌 내재적 결함에서 찾고 있다. 지모에 능했던 신하 범증이 쫓겨나 죽은 뒤에 패망의 길이 열렸다. 한신의 배신, 진평의 이간계, 한나라의 금전 공세 등 외부 요인들은 너무나 많았으나 진정한 원인은 항우 자신의 의심 많은 성격 탓이었다. 중동(重瞳)은 눈동자가 두 개인 것을 말하는데 항우의 신체적 특징을 지칭한다. 중요한 것은 항우의 의심이 단순한 성격적 결함이 아니라, ‘천성(天性)’, 즉 타고난 본질이라는 점이다. 이는 영웅의 몰락이 운명적 필연이었음을 말해준다. 권력은 자멸의 유혹에 빠지기 쉽다. 권력의 붕괴는 외부가 아닌, 스스로의 손에서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