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 신의(信義)
4.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 신의(信義)
박판서(朴判書) 박서(朴遾)는 나의 선친(先君) 익헌공(翼憲公) 정태화(鄭太和)와 동갑내기 친구다. 어릴 적에 어떤 집안과 혼인을 약속하였는데, 그 처자가 위독한 병을 앓았다가 겨우 살아났으나, 두 눈이 병으로 인해 실명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당시 박공의 부친께서는 이미 세상을 떠나신 상태였으므로, 맏형이 어머님께 다른 혼처를 구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씀드렸다. 이에 박공이 말하였다.
“병으로 눈이 먼 것은 하늘이 내린 운명이요, 그녀의 허물이 아닙니다. 눈먼 아내라도 함께 살 수 있지만, 신의 없이는 사람으로서 설 수 없으니, 약속을 바꿀 수 없습니다.”
맏형은 이 말을 기이하게 여기며 허락하였다. 혼례를 치를 때 신부의 눈은 실제로 멀지 않았으니, 원수 집안의 이간질이었다.
박서의 아버지는 어떤 사람과 사돈을 맺기로 약속했다. 세월이 흘러 박서의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고 혼인을 맺은 상대 여자는 병으로 실명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박서의 형은 혼인을 없었던 일로 하기를 바랐다. 상대 여자의 실명(失明)은 결혼 생활에 치명적인 귀책 사유가 될 수 있으니 혼약을 파기한다고 한들 도덕적으로 크게 비난받을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박서는 그녀의 실명을 허물로 보지 않고 운명으로 보았다. 그의 판단 기준은 눈앞의 실리가 아니라 신의라는 원칙과 가문 간 계약에 대한 존중이었다. 마침내 그는 혼인을 강행하였다. 막상 혼인 때 보니 신부의 눈은 멀쩡했다. 원수의 집안이 두 집안의 혼인을 방해하기 위해 꾸며낸 이야기였다. 만약 형의 말대로 이간질에 넘어갔다면 혼인은 성사되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박서의 신의가 거짓 소문을 이기고 혼인을 지켰다.
이 사건의 진정한 의미는 단순히 박서의 신의에만 있지 않다. 오히려 이 이야기는 조선시대 혼인 시스템의 취약성을 드러낸다. 혼전까지 혼인 상대자가 얼굴을 보지도 못한 상태이니 혼약은 뜬소문 하나에도 쉽게 흔들릴 수 있었다. 따라서 맏형의 혼인 파기 주장은 당시의 합리적이고 일반적인 반응이었을 것이다. 박서는 이러한 상식과 달리 개인의 원칙을 예외적으로 선택한 인물이다. 그의 선택은 혼약 파기의 명분으로 삼을 수 있었던 ‘실명’보다 ‘운명’과 ‘허물’을 먼저 내세운다.
『속복수전서』에는 이와 유사한 이야기가 하나 더 나온다. 김안국은 외동딸을 강태수(姜台壽)의 아들 강복(姜復)과 혼인시키기로 약속하였다. 뒤늦게 강복에게 병이 있다는 말을 들었지만, 약속을 저버리지 않고 혼인을 했다. 요즘의 상식과는 어긋나는 이야기다.
이 두 사례가 보여주는 관념은 현대의 혼인관과 뚜렷이 구분된다. 오늘날 혼인의 지속 여부는 ‘관계의 현 상태’에 대한 평가가 중요한 기준이라면, 당시 박서와 김안국의 선택은 ‘이미 맺은 약속의 무게’ 그 자체를 최고의 가치로 삼았다. 곧 계약 자체를 계약 이후의 상태보다 무겁게 여겼다. 신의란 나나 타인의 상태가 바뀌더라도 변치 않는 고귀한 마음 자체를 말한다.
부원수(副元帥) 유극량(劉克良)은 송경(松京, 개성)에 살았는데, 그의 어머니는 옛 재상 홍섬(洪暹)의 여종이었다. 공은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무예를 익혀 무과에 급제했다. 여러 관직을 거쳐 현달해지자 대신들이 앞다투어 그를 장수 재목으로 천거하였다.
어머니가 공에게 말하였다.
“나는 본래 어느 집안의 여종이었단다. 젊어서 옥 잔을 잘못 깨뜨려 벌을 받을까 두려워 도망쳤다가, 네 아버지를 만나 너를 낳았지.”
공은 이 말을 듣고 크게 놀라 곧바로 한양으로 올라가, 주인집을 찾아내어 그 사정을 아뢰고, 상소를 올려 과거 급제를 취소하고 다시 노비로 돌아가려 하였다.
홍섬이 말했다.
“그대는 나의 노비가 아닌데, 어찌 이런 말을 하는가?”
공이 답했다.
“어머님께서 이미 말씀하셨으니, 어찌 감히 법을 어기고 주인을 배반하며 임금을 속이겠습니까?”
홍섬은 그를 의롭게 여겨서 면천 문서를 써주자, 공은 사례하고 떠났다. 그러나 매번 홍섬을 주인이라 불렀다. 고을 수령이 되거나 변방의 장수가 되어서도 선물을 끊임없이 보냈다. 직접 뵐 때마다 마을 입구에서부터 걸어 들어가며, 바치는 물건은 반드시 손수 들고 바쳤다.
한번은 위장(衛將)으로 군사를 나누어 배치하는 중이었는데, 홍섬이 궁내에서 숙직을 서다가 할 말이 있어 쪽지에다 몇 자를 적어 그를 불렀다. 공이 곧바로 자리를 뜨려 하자, 병조와 도총부의 관원들이 말했다.
“군사를 배치하는 일은 국가의 대사인데, 어찌 경솔하게 떠나려 하시오?”
공이 답했다.
“옛 주인의 부름을 받았으니, 감히 지체할 수 없소.”
그러자 같은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놀라 감탄하였다. 임진왜란 때 전사하였다.
어머니는 옥 잔을 깨뜨린 뒤 처벌이 두려워 도망친 노비였다. 이게 사실로 밝혀지면 유극량도 노비 신분으로 추락하게 되고, 어렵게 이룬 급제도 급제 후에 이룬 성취도 다 물거품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유극량은 이 사실을 숨기는 대신 어머니의 옛 주인 홍섬을 찾아가 저간의 사정을 솔직하게 이야기한다. 홍섬은 그를 기특하게 여겨 서류상 아무런 문제 없이 깨끗한 신분으로 만들어주었다. 유극량은 홍섬을 찾아갔고, 홍섬은 그를 위해 문서를 써주었다. 한 사람은 의로웠고 다른 한 사람은 배포가 컸다. 유극량은 그 후로도 홍섬을 평생의 주인으로 섬기며 감사한 마음을 잊지 않았다.
이 이야기의 핵심은 엄격한 신분제 사회에서, 법적인 강제가 아닌 자발적 의리가 어떻게 관계를 만들어가는지를 보여준다는 점에 있다. 지금은 주종 관계도 상하의 구분도 사라진 시대이다. 하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에 법과 계약을 넘어서는 신뢰가 관계에 깊이를 더해준다는 원칙만은 여전히 유효하다.
조선시대의 의리는 신분 질서 속에서 관계를 지속시키는 방식이었지만, 오늘날의 의리는 제도 밖에서 개인의 선택과 노력 속에서 지속된다. 유극량과 홍섬의 일화는 법과 계약을 넘어선 신뢰가 인간관계의 무게와 존엄을 결정한다는 점을 일깨워준다.
유성이 젊어서 소년들과 성거산에 놀러 갔을 때, 큰 호랑이가 수풀 속에서 죽었고 곁에 새끼 두 마리가 있었는데 거의 굶어 죽을 지경이었다. 소년들이 모두 큰 호랑이의 가죽을 벗기고 뼈를 취하며 새끼들마저 죽이려 하자, 유성이 말했다. “죽은 것은 더러우니 가까이할 수 없고, 새끼 두 마리는 어미를 잃었으니 어찌 차마 해를 가하겠습니까?” 힘으로 다투어 막았다. 유성이 새끼들에게 먹이를 주고 품에 안고서 집에 데려와서 길렀다. 4, 5개월이 지나 점차 자라 달려서 뛰어 오를 때가 되자, 휙휙 하고 바람 기운이 일었으며 사람을 보면 성내어 물려는 모습을 보였다. 집안사람이 매우 두려워하고, 유성도 후환이 있을까 염려하여 집 뒤 산골짜기로 옮기고 날마다 밥을 날라 주었다. 또 한 달쯤 지나 두 마리 호랑이가 달아나자, 유성이 산에 올라 두루 찾았는데, 두 마리 호랑이가 산 아래에서 함께 어린아이 하나를 먹고 있었다. 유성이 깜짝 놀라 달려 돌아와서, 이로부터 먹이 주기를 끊었다.
이듬해 겨울 밤중에, 호랑이가 집에 와서 울부짖었는데, 이튿날 아침에 나가 보니 큰 사슴 한 마리가 문밖에 놓여 있었다. 유성이 놀라 괴이하게 여겨 마침내 이웃에 사는 친척들과 함께 나누어 먹었다. 몇 달이 지나 또 큰 사슴을 놓아두었다. 마을 사람들이 모여 구경하며 탄식하고 괴이하게 여겼다. 유성이 말했다. “이런 물건은 사사로이 쓸 수 없소.” 곧바로 관가에 갖다 바쳤다.
유성의 어머니는 40년 전에 어느 집 종이었는데, 유성의 아버지가 데리고 도망쳤다. 어머니가 자발적으로 달아난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주인을 배반한 셈이다. 유성은 이 이야기를 듣고 어머니의 옛 주인 김 감찰을 백방으로 수소문해 찾아낸다. 김 감찰은 이미 세상을 떠난 지 10년이 지났고 부인만 생존해 있었다. 유성은 때마다 물건을 보내 부인을 챙겼다. 부인이 임종 시에 여러 번 면천 문서를 주려 했으나 유성은 한사코 사양하다가, 부인이 세상을 떠나자 면천 문서를 태워 버렸다. 유성은 평생 주인의 제사를 정성껏 모셨다. 여기까지가 이 글의 생략된 앞머리다.
유성이 어렸을 때 벌어진 사건이다. 호랑이가 새끼 두 마리를 남겨둔 채 죽어 있었다. 사람들은 죽은 호랑이의 가죽과 뼈를 취하려 하고, 새끼들도 죽이려 했다. 유성은 사람들을 만류하며 새끼들을 데려다 길렀다. 새끼들이 자라자 풀어준 뒤에도 날마다 밥을 가져다 두었다. 더 시간이 흘러 호랑이 새끼들이 어린아이를 잡아 먹는 모습을 보고서는 더 이상 먹이를 주지 않았다. 짐승의 본성이 사람을 해치자 가차 없이 연을 끊은 것이다. 그런데 이듬해 겨울밤에 호랑이가 울부짖고 간 자리에는 큰 사슴 한 마리가 놓여 있었다.
유성은 사람의 도리를 다해 어머니의 옛 주인을 섬겼고, 생명을 귀하게 여겨 짐승을 거두었다. 옛 주인은 면천 문서로 그 의로움에 답했고 호랑이는 사슴으로 그 은혜에 답했다. 신분과 인수(人獸)의 차이에도 진심은 통하고 은혜는 돌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