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세상에서 나를 지키는 조선의 스무 가지 원칙

2) 반환(返還) — 돌려보내는 결단

by 박동욱

2) 반환(返還) — 돌려보내는 결단

이평정공(李平靖公) 약동(約東)이 일찍이 제주목사로 재임하였는데, 그가 돌아갈 때 오직 채찍 하나만을 가지고 있었다. 조금 있다가 말하기를 “이것도 관아의 물품이다” 하며, 그것을 관아의 누각에 걸어두었다. 세월이 오래되어 채찍이 떨어지자, 고을 사람들이 그 걸었던 자리에 채찍 모습을 그려 붙여 두고, 사모하는 마음을 담았다.

바다를 건널 때, 배가 바다 한가운데서 갑자기 흔들려서 위태로워졌다.

공이 꿈쩍도 하지 않고 말하였다.

“내 행장엔 사사로운 물건이 하나도 없는데, 어찌 수하가 속여서 더럽힘으로써, 신명이 나에게 경고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당초 본주(本主)의 장수와 사졸들이 공이 일찍이 유장(儒將)으로 천거되었으므로, 갑옷 한 벌을 가져와서 공이 갑옷을 입을 날을 기다렸으나, 공이 알면 반드시 물리칠까 두려워 수행하는 비장(裨將)에게 몰래 부쳐, 바다를 건넌 뒤에 자세히 아뢰려 하였던 것이다. 이때 이르러 모두가 ‘강신(江神)도 그 얼음 같은 절개를 더럽히려 하지 않아 이런 기이한 일이 생겼다’고 여기고, 마침내 사실대로 고하였다.

공이 그것을 바다에 던지라 명하니, 파도가 잦아들어 배가 갈 수 있게 되었다. 지금까지 그곳을 '투갑연(投甲淵)'이라 부르며, 그의 청백함은 역사에 남게 되었다.



그는 신화가 되었다. 제주목사 임기가 끝났을 때 채찍 하나만 가지고 있었는데, 그나마 관물이라며 관아의 누각에 걸어두었다. 세월이 지나 채찍이 떨어졌으나, 고을 사람들은 채찍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 붙였다. 그림으로라도 기억하고픈 청백리였다. 육지로 돌아오는 뱃길에서 배가 가라앉을 위기에 처했다. 이약동은 “내 행장에 사사로운 물건이 없는데 이런 위기가 닥치다니, 누군가 나를 속여 부정을 저질렀을 것”이라고 의심했다. 알고 보니 부하들이 이약동이 거절할까 두려워 몰래 갑옷 한 벌을 챙겨 실었던 것이었다. 이약동은 주저하지 않고 갑옷을 바다에 던지라고 명하자 파도는 잔잔해졌다. 그의 청렴은 채찍의 자취 그림과 투갑연이란 지명으로 사람들에게 기억됐다.

이렇게 관가의 물건에 대한 결벽증적인 태도는 여러 사람의 기록에 남아 있다. 김명중(金命仲)은 풍덕군수를 마치고 돌아올 때 가족들이 관아에서 쓰던 돗자리를 가져왔다. 그가 이 사실을 알고는 불같이 화를 내고 “당장 돌려보내라”고 호통쳤다. 이웃 친구가 돗자리 하나를 돌려보내는 것은 너무 유난스러워 보이니 자신에게 달라고 하자, 김명중이 그에게 주었다.

또, 이극배(李克培)는 동생 이극돈(李克墩)의 집에 가서 처마 밑에 사복시에서 쓰는 관용 새끼줄이 있는 것을 보고 크게 꾸짖었다. “사복시 줄은 말을 매는 데 써야지. 어찌 네 집 뜰에 있느냐”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가 버렸다.

공적인 자산에 대한 아무런 죄의식도 없이 사적으로 편취하는 일은 지금도 공직 사회에서 비일비재하다. 공복(公僕)이란 말이 무색하다. 공복이란 백성에게 봉사하는 것이지, 특권을 누리는 것이 아니다. 공직의 기강은 거창한 구호가 아니라, 돗자리 한 장과 새끼줄 하나를 대하는 태도에도 판가름 난다.






최참판(崔叅判) 치운(致雲)이 중국으로 사신을 갔다가 돌아온 후, 공로에 따라 밭 5백 결(結)과 노비 30인을 하사받았다. 공이 단호히 노비 하사만을 사양하며, 무려 일곱 번이나 상소를 올렸다.

허조(許稠)가 이에 대해 논평하였다.

“이 사람은 겉치레로 상을 사양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으로 진심으로 원치 않는 것이니, 마땅히 그 뜻을 들어주어 훗날 청렴한 이름을 이루도록 해야 합니다.”

공이 집에 돌아와 기쁜 마음으로 부인에게 말하였다.

“오늘에야 내 간청이 받아들여졌소!”

부인이 한숨을 쉬며 대답하였다.

“임금께서 주신 것마저 사양하다니, 복도 없도다!”



세종 15년, 야인(野人)이 명나라 황제의 명을 받들어 조선을 침략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최치운은 사신으로 명나라에 가서 황제를 설득해 칙서를 받아와 침략을 막았고, 그 공로로 땅과 노비를 하사받았다. 땅은 받았지만 노비는 무려 7번이나 상소를 올려 사양했다. 사양하는 시늉만 한 것이 아니라, 정말로 노비를 받기 싫다는 뜻을 분명히 밝힌 것이다. 그런데 왜 땅은 받았으면서 노비는 사양했을까? 임금이 내린 상을 다 거절하는 것은 자칫 항명으로 비칠 수 있다. 본인의 의도와 상관없이 임금의 은총을 거부하는 꼴이 된다. 토지와 노비 전부 받을 수는 없어서, 그중에 땅을 선택한 것이다. 토지는 소유의 대상일 수 있지만 인간은 소유할 수 없다는 그만의 원칙이 작용했던 듯하다. 허조는 최치운의 결정을 깊이 이해하고 임금을 설득했다. 그러나 최치운의 아내는 달랐다. 아내의 눈에 노비를 거절한 일은 굴러 들어온 복을 걷어찬 일로 해석되었다. 그녀에게 노비는 인간이 아니라 재산이었기 때문이다. 부인에게 복이 날아간 날이, 최치운에게는 원칙을 지킨 명예로운 날이 되었다.






이효익공(李孝翼公) 준민(俊民)이 청렴결백함으로 한 사람의 무관을 추천하였다. 그가 제주목사(耽羅牧使)로 부임하여 망아지 한 필을 보내자, 공은 받아서 길렀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그가 교체되어 돌아와 공을 알현하였을 때, 공은 사람을 시켜 그가 타고 온 말을 끌고 들어오게 하였는데, 보잘것없는 말이었다. 공이 말하였다.

“무장은 이런 말을 타서는 안 되오. 내게 무사에게 정합한 말이 있소.”

곧바로 잘 길들여진 준마를 그에게 주었는데, 그 사람은 후에 자기가 보낸 그 망아지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후로 그는 항상 공의 덕량(德量)에 감복하였다.



이준민이 제주목사로 무관을 추천하자 무관은 감사의 표시로 망아지 한 필을 보내왔다. 청탁을 받고 추천을 한 것이 아니니 대가성이 있는 뇌물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순수한 감사의 선물을 매몰차게 마다하는 것도 상대방에 대한 예의는 아니다. 이준민은 고심 끝에 망아지를 일단 받았다. 하지만 자기의 소유로 삼은 것이 아니라, 언젠가는 돌려줘야겠다는 마음으로 정성껏 길렀다. 훗날 무관이 임기를 마치고 돌아갈 때 인사차 왔는데, 보잘 것 없는 말을 타고 왔다. 이것을 보고 이준민은 자신이 잘 키워둔 준마를 내주었는데, 그것은 바로 예전에 받았던 그 망아지였다.

살다 보면 호의와 원칙 사이에 갈등이 생길 때가 많다. 자신만의 원칙만 고집하면 타인에게 각박해 보이고, 타인의 호의를 무조건 받으면 자신의 원칙을 훼손하게 된다. 이준민은 거절 대신 위탁을 선택했고, 망아지를 명마로 키워 돌려줌으로써 호의와 원칙을 현명하게 조화시켰다. 원칙을 지키면서도 사람까지 얻는 고수의 처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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