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궁핍(窮乏) — 가난 속의 당당함
3) 궁핍(窮乏) — 가난 속의 당당함
유하정(柳夏亭) 관(寬)은 청렴과 검약으로 자신을 지켰다. 몇 칸의 초가집에 살면서도 마음이 평온하였다.일찍이 장마가 한 달 동안 계속되어, 지붕이 새는 것이 삼베실 같았다. 공이 손으로 우산을 받쳐 비를 피하다가, 부인을 돌아보며 말하였다.
“우산 없는 집은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소?”
부인이 말하였다.
“우산이 없는 사람은 반드시 다른 대책이 있기 마련입니다.”
공의 벼슬이 정승이 되었으나, 그의 행동은 평범한 사람과 다름없었다. 사람이 찾아와 알현하면, 겨울에도 맨발에 짚신을 끌고 나와 맞이하였다. 때로는 호미를 들고 채소밭을 돌보면서도, 수고롭다고 여기지 않았다.
장마철 방 안은 비가 주룩주룩 새었다. 간신히 우산을 쓰고 버틸 지경이었다.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모를 풍경이다. 그렇지만 이런 빈곤은 그가 공직에 있으면서도 사익을 위해 살지 않았다는 방증이 되었다. 유관은 우산도 없는 사람은 이렇게 비 새는 것을 어떻게 견디겠냐며 이 민망한 상황을 유머러스하게 넘어간다. 아내는 우산이 없으면 없는대로 다른 방도가 있다고 말한다. 부창부수가 아닐 수 없다. 유관은 고위직에 올랐지만 보통 사람과 다를 바 없이 행동했다. 맨발에 짚신 차림으로 사람 맞거나, 시간이 나면 호미로 밭을 가꿀 뿐이었다.
비에 젖은 정승은 유관만이 아니었다. 맹사성의 집은 몹시 비좁고 초라하였다. 어느 날 병조판서가 업무를 아뢰러 갔다가 갑작스런 소나기를 만나, 집안 곳곳에서 새어 내리는 빗물에 의관이 모두 흠뻑 젖었다. 판서는 집에 돌아와 탄식하였다. “정승의 집이 이러함에도 내가 어찌 행랑을 지으리?” 곧이어 짓고 있던 행랑을 헐어버렸다.
맹사성의 청렴은 식사에서도 드러난다. 묵은 쌀로 지은 밥만 먹다가 어느날 새 쌀밥이 나와서 이유를 묻자, 부인이 대답하였다. “묵은 쌀이 오래되어 먹을 수 없어 이웃에서 빌렸습니다.”라고 하자, 맹사성은 “이미 나라에서 녹을 받았는데, 어찌 또 빌린단 말이오?”라며 꾸짖었다.
이들에게 가난은 불편함이 아니라 마음의 편안함이고 떳떳함이었다. 비는 피하면 그만이고 밥은 굶지 않으면 그뿐이다. 그러나 부정한 재물이 자신의 집에 들어오는 것은 무엇보다 견디기 힘든 수치로 여겼다.
반성군(潘城君) 박씨는 비록 조정 내직과 외직을 두루 거치며 대신의 지위에 이르렀다. 그러나 평소 검소하고 화목하여, 받은 녹봉을 모두 친족과 친구들에게 나누어 구제하느라 집안이 몹시 가난하였다.
하루는 태종이 갑자기 찾아왔는데, 대문 앞에 서서 한참을 기다리게 했다. 박씨가 비로소 나와 맞이하여 절하자, 태종이 괴이히 여겨 그 까닭을 물었다. 박씨가 대답하였다.
“신이 마침 좁쌀을 지어 먹으려 하였는데, 입에 넣고 여러 번 씹었으나 목에 넘기지 못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조금 늦을 수밖에 없었으니,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태종이 깊이 탄식하며, 청문(靑門) 밖 고암(鼓巖)의 전지 몇 묘를 하사했다. 이 전지는 지금까지도 그 자손들이 대대로 지키고 있다고 한다.
반성군(潘城君) 박은(朴訔)은 높은 지위에 있었으나, 어려운 친지와 친구들에게 녹봉을 나눠 주느라 정작 자기 집안은 몹시 가난했다. 어느 날 태종이 예고 없이 박은을 찾아왔는데, 대문 밖에서 한참을 기다리게 하였다. 임금을 문밖에 세워둔 것은 무례한 일이었다. 알고 보니 조밥을 먹고 있었는데 목에 걸려 여러 번 씹어도 넘어가지 않아 늦었다고 했다. 쌀밥을 먹어도 시원치 않은 재상이 거친 조밥으로 겨우 끼니를 잇고 있었던 것이다. 태종은 그 사실에 탄식하며 토지를 하사하였다. 박은이 말하지 않아도 목에 걸린 좁쌀 한 톨이 그의 평생을 말해준다.
임소암(任踈菴) 숙영(叔英)이 을묘년(1615)에 삭탈관직 되어 봉안역(奉安驛)에 살 때, 미음과 죽으로 간신히 연명하였다. 어떤 사람이 장난삼아 말하였다. “그대는 참으로 신선이로소이다. 먹지 않고도 죽지 않으니” 기미년(1619)에 큰 기근이 들었을 때,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올해는 그대의 목숨이 반드시 위태로울 텐데, 어찌 근심하는 기색이 없으십니까?” 공은 웃으며 말하였다. “내가 이미 죽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소. 죽으면 반드시 아귀(餓鬼)가 될 터인데, 만약 다시 근심하면 수귀(愁鬼)가 되고 말 것이오. 귀신 하나가 두 가지 역할을 맡을 수는 없기에 근심하지 않는 것이오.”
정립(鄭岦)은 공과 평소 서로 친하게 지내던 사이였다. 무오년(1618)에 관동 지방에 관찰사로 나갔을 때 공의 집에 들러 묵게 되었는데, 공이 조밥을 먹는 것을 보고 말하였다. “선생께서 만약 종이 몇 묶음을 저에게 보내주시면, 마땅히 환산하여 장부에 기록한 뒤, 종잇값에 해당하는 쌀을 받아 보내주겠소. 그러면 선생도 쌀밥을 드실 수 있을 것이오.” 공이 말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방납(防納)이라고 하는 것이오?” 정립이 답하였다. “이것은 관청의 종잇값일 뿐이오. 사대부들이 모두 받기를 청하는 것이니, 그대도 꺼리지 마시오.” 이에 공이 정색하며 말하였다. “종이를 조금 들이고 쌀을 후하게 받는다면, 이것이 방납이 아니고 무엇이겠소? 옛 친구와 오래 떨어져 있다가 서로 만나게 되어 마음이 기쁜데, 어쩌자고 이런 일을 가지고 나에게 권한단 말이오?” 정립은 크게 부끄러워하였다.
임숙영은 죽으로 연명할 지경이었다. 그런데 몇 해 뒤에 큰 기근까지 들었는데도 그에게 근심하는 기색이 없자 사람들이 의아해하며 그 까닭을 물었다. 임숙영은 굶어 죽는 아귀(餓鬼)의 운명이니 굶어 죽을 처지를 근심하는 수귀(愁鬼)까지 되고 싶지는 않다고 했다. 어차피 굶어 죽을 운명이라면, 마음이라도 편하게 있다가 죽겠다는 선언이었다.
이러한 마음은 기근 바로 한 해 전 정립과의 일화에서도 드러난다. 정립은 임숙영과 이물 없는 사이여서 그의 딱한 처지를 모른 척할 수 없었다. 자신의 감영(監營)에 여러 고을에서 종이를 공급하는데, 그 종잇값이 시장 가격의 몇 배나 쳐주니 종이 몇 묶음을 보내주면 그것으로 행정 처리를 하여 쌀밥을 먹게끔 해주겠다고 제안한 것이다.
임숙영은 이런 제안이 방납에 해당한다고 꼬집는다. 방납은 공납 대신 돈이나 물품을 납부하는 제도였으나, 중간 상인들이 개입해 백성을 착취하는 폐단이 심했다. 정립의 제안은 그 편법을 이용해 친구를 도우려던 것이었다. 임숙영은 친구의 호의를 거절하면서 방납제도의 폐단과 이 편법을 동시에 비판한 셈이다. 양반은 얼어 죽을지언정 곁불을 쬐지 않는다. 당당하지 못하게 배를 채우느니 차라리 당당한 아사(餓死)를 선택하겠다는 다짐이다.
유대헌(柳大憲) 경창(慶昌)은 청렴결백한 절조로 당대 사람들의 탄복을 받았다. 그가 안변부사에서 물러나 고향에 살고 있을 때, 도둑이 그의 방에 침입하여 방 안을 샅샅이 뒤졌으나 쓸 만한 물건이 하나도 없었다. 도둑이 밖으로 나와 앞산에 마주 보고 서서 유대헌의 이름을 불러 욕하며 말했다.
“이 개 같은 놈이, 어찌 방금 큰 고을 수령에서 물러났는데 집에 물건 하나 없단 말인가?”
관리들이 지방관으로 나가는 것은 한몫을 챙길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던 도둑은 일부러 유경창의 집을 털었다. 지방관을 지냈으니 값나가는 물건이 있으리라는 판단에서였다. 그러나 막상 집에 들어가 보니 값이 나갈 물건이 하나도 없었다. 도둑이 허탕을 쳤으니 유경창에게 “개같은 놈!”이란 욕을 퍼부었다. 하지만 이것은 세상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욕이었다. 청백리라는 인증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례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양사헌은 무려 40년 동안 여덟 번이나 지방관을 역임했으나 재산을 한 푼도 늘리지 않았고, 말 한 필도 소유하지 않았다. 처자식의 안락함을 위한 어떤 계획도 세우지 않았다. 관직은 봉사하는 자리이지, 자신의 부를 늘릴 수 있는 기회가 아니다. 이를 잊어버리는 순간, 도둑의 욕설이 명예가 되기는커녕 스스로 뻔뻔한 도둑이 되고 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