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명시(絶命詩)-
임금 계신 곳 비추리라
呼船東問魯連津 배 불러 동쪽으로 노중련의 나루터 묻노니
五百年今一介臣 오백년 고려조의 초개 같은 신하로다.
可使孤魂能不死 외로운 나의 영혼 죽지 않고 있다면
願隨紅日照中垠 붉은 해 따라가서 임금 계신 곳 비추리라.
김제(金濟), <絶命詩>
[평설]
김제(金濟)는 고려 공양왕 때 조봉랑(朝奉郎)으로 평해군수에 재직하다가 망국의 소식을 듣고 깊이 통곡하였다. 노중련(魯仲連)의 고사를 본받아 이름을 제해(濟海)로 고쳤다고 한다. 김제는 이 시를 읊고서 처자식을 버리고 삿갓을 쓰고서 조각배를 타고 바다로 들어가서 가는 곳을 알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이 시는 일종의 절명시로 볼 수 있는데, 군벽시(郡壁詩),벽상시(壁上詩), 절명시(絶命詩), 도해시(蹈海詩) 등 다양한 제목으로 전해진다. 널리 회자되며 여러 문인들에게 언급되었으니, 자결의 방식으로 도해(蹈海)를 택했다는 점이 상당히 강한 인상을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1,2구에서는 직접 도해(蹈海)의 의지를 드러냈다. 전국 시대 때 제(齊) 나라의 고사(高士) 노중련(魯仲連)이, 진(秦) 나라에서 황제를 자처하는 꼴을 보기보다는 차라리 동해에 빠져 죽겠다.[蹈東海而死]고 말한 고사가 있다. 3,4구에서는 죽어서라도 임금을 향한 충절을 지키고자 하는 다짐을 말했다. 노중련은 도해의 의지를 피력하긴 하였지만 실제로 결행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육수부(陸秀夫, 1236~1279)의 일과 매우 닮아 있다. 그는 남송이 원에게 망하게 되자 포로가 되지 않기 위해 처자식을 자결케 하고, 어린 황제를 등에 업고 끈으로 묶은 다음 바다로 뛰어들어 삶을 마감했다.
김제의 이야기는 구전되어 전하다가 1785년(정조 9) 농암(籠巖) 김주(金澍)의 위패를 모시던 내격묘(來格廟)를 중수할 때 상량문에서 구전되던 내용이 사실임이 밝혀졌고, 4년 후 한 선비의 집에서 『해동시보(海東時譜)』에 기록된 벽상시(壁上詩)가 발견되어 당시의 사실이 비로소 세상에 알려졌다. 김제는 새로운 왕조의 신하가 되기 보다 망국의 신하로 남길 바랬다. 바다에 몸을 띄워 죽어가는 그 순간까지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 절절한 충의에 가슴이 먹먹해 온다.
[작가소개]
김제(金濟, ?∼?)는 본관은 선산(善山), 호는 백암(白巖)이다. 고려에서 평해군수(平海郡守)로 있다가 조선이 건국되자 이름을 제해(齊海)라 바꾸었다. 그리고 어느 날 벽에다 시 한 수를 써놓고 바다로 떠난 후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정조(正祖)는 김제와 김주를 고죽국의 백이·숙제의 충절에 비유하면서 바다에 단을 세워 초혼제를 치르게 하였으며, 안동의 고죽서원(孤竹書院)에 배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