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명출판] 눈 내린 길 함부로 걷지 마라 - 산운집-

by 박동욱

곧 제가 쓴 새 책이 소명출판사에서 출간됩니다. 이양연의 산운집입니다. 서문을 공개합니다.




『눈 내린 길 함부로 걷지 마라 – 산운집』


서문

산운(山雲) 이양연(李亮淵, 1771~1856)은 조선 후기에 활약했던 뛰어난 시인이었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자는 진숙(晉叔)이며, 호는 임연재(臨淵齋)․산운(山雲)이다. 평생 변변찮은 벼슬에도 오르지 못하고 삶을 마감했다.

그의 시는 200여 편에 불과하지만 조선의 어떤 시인보다 우수한 시적 성취를 보여주고 있다. 주로 5언 절구와 5언 고시에 특장을 보인다. 전고(典故)를 거의 사용하지 않으면서 담백한 시어를 써서 뛰어난 발상과 감각으로 새로운 시세계를 구축했다. 전통적 한시의 자장(磁場)에서 벗어나 조선적인 한시를 구현했다는 데 큰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이양연의 시는 기본적으로 삶의 통찰에서 나온 비애와 우수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조선적인 아름다움을 담고 있는 민요시와 백성들의 고통스러운 현실을 날카로운 필치로 그려낸 민중시 등이 유명하다. 또, 유람을 즐겨했는데 역사적인 장소를 찾아 회고적이고 애상적인 기조로 그려냈다. 대중들에게는 서산 대사나 김구 선생의 시로 알려진 「野雪」의 작가로 유명하다. 이 시를 읽으면 자세한 설명 없이도 깊은 울림과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대표작인 이 시는 그의 작품에서 느낄 수 있는 아름다움을 잘 보여준다.

이 책은 산운의 한시 모두를 빠짐없이 수집하고 번역한 뒤에, 작품마다 평설을 붙였다. 평설은 전공자와 일반인들 모두에게 그에 걸맞은 정보와 정감을 전달하려고 노력했다. 산운 이양연은 내 공부의 출발점이다. 어느 날 학회에 다녀오신 정민 선생님께서 이양연과 이용휴가 참 좋다고 하셨다. 그렇게 이양연과 이용휴는 나의 석사 논문과 박사 논문의 테마가 되었다. 지도 교수이신 정민 선생님께서는 당시 백지 같던 내게 공부하는 방법부터 한시 번역까지 하나하나 지도하고 채워 주신 고마운 분이다.

오랜 시간 공부해 오면서 마음에서 산운 이양연을 잠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연구 대상을 간절하게 생각하고 원하면 꿈에 나와 모르는 시 구절을 가르쳐 주기도 하고 미소도 띄우며 함께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정성이 부족했었는지 나는 그런 경험을 해본 적이 없지만, 늘 마음으론 산운 이양연 선생이 그립고 고마웠다.

해질녘, 아이들이 어머니 부르는 소리에 하나둘씩 집으로 뛰어가고, 어느새 어두워진 골목에 혼자 남아 있는 어린 아이가 된 것만 같다. 날 혼자 내버려둔 그 누군가에 대한 원망보다 정작 내가 원망해야 할 대상은 어둠 속에서 자책하고 나약해지던 바로 나 자신의 시간과 마음이 아닐까 싶다. 어두운 그 골목에 하염없이 서 있을지, 아니면 그곳을 벗어날 날이 언젠가 내게 찾아올지 아직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어두운 골목에 서 있었던 그 기억만은 오랫동안 간직하고 싶다.

20여년의 세월 동안 화요일 아침마다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일평 조남권 선생님을 찾아뵙고 함께 공부했다. 날씨가 궂어도, 몸이 아파도, 나는 이 공부 시간을 거른 적이 없었다. 20대 청년이었던 나는 어느새 50대 중년이 되었고, 60대였지만 젊은이 못지않게 걸음이 빠르셨던 선생님께서는 계단 오를 기운조차 없는 90대 노인이 되셨다. 모든 일에는 시작이 있듯 마지막이 있기 마련이다. 2020년 8월 18일은 선생님과 내가 공부한 ‘마지막 날’이 되었다. 조금씩 선생님과의 마지막을 예감하며 준비했었지만 현실로 마주한 마지막은 생각보다 더 서글프고 쓸쓸했다. 선생님께서는 심해진 치매에도 신기하게 아직 나를 알아보신다. 나는 세상에서 선생님께서 유일하게 알아보시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가 되어 버렸다. 그간의 세월이 스쳐 지나간다. 이 책을 나의 영원한 스승, 일평 조남권 선생님께 바친다.

2021년 1월 18일 박동욱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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