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을 때까지 물 긷고 불 때야 하리
4. 도망친 노비 잡는 법
장화(張華)의 �물류상감지(物類相感志)�에 “도망한 사람의 의복을 가져다가 우물 속에 늘어뜨리고 돌리면 도망한 사람이 저절로 돌아온다” 하였다. �본초(本草)�에 “도망한 사람의 머리카락을 물레 위에 놓고 돌리면 정신이 없어서 어디로 갈 것인지 알지 못한다” 하였다. 지금의 풍속에는 종이에 도망한 사람의 성명(姓名)을 써서 대들보 위에 붙여놓는데 그 또한 이와 같은 유(類)이다.
노비의 도망을 막는 방법을 다룬 책으로는 홍만선(洪萬選)의 �산림경제(山林經濟)�, 빙허각 이씨(憑虛閣 李氏)의 �규합총서(閨閤叢書)�, 서명응(徐命膺)의 �고사신서(攷事新書)� 등이 있다. 위의 인용문은 �산림경제�에 실려 있는 글로, �지봉유설�에 실린 글을 그대로 전재하였다. 이미 �산림경제�에서 노비가 도망할 마음이 생기지 않는 방법으로 “시루를 동였던 삼[甑帶麻]으로 실을 만들어 왼쪽으로 꼬아 노비의 옷 등솔에 1척 6촌의 길이로 꿰매놓으면 곧바로 도망할 마음이 없어진다”라고 제시한 바 있다. 이 글 바로 아래에 도망간 노비가 저절로 돌아오는 방법으로 도망 노비의 옷을 우물 속에서 돌리거나 머리카락을 물레 위에 놓고 돌리기, 또 이름을 써서 대들보 위에 붙여놓기 등 세 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그만큼 도망 노비는 그 당시 심각한 사회 문제로 대두되었다.
가난한 집 두 명의 종년이 家貧二婢子
밤 틈타 원숭이처럼 달아났도다. 乘夜走如猿
천한 것들 어찌 의리 알고 있으랴 賤者豈知義
주인 은혜 못 베풀어 부끄러울 뿐. 主人慚少恩
길쌈 일 하지 못할 지경이었고 桑麻行廢業
허드렛일 마을사람 기다려야 하네. 水火坐須村
소영사(蕭穎士)는 시(詩)가 어떠했기에 穎士詩何似
창두(蒼頭)가 맹세코 집을 지켰던가? 蒼頭矢守門
_이희사(李羲師), 「여종이 달아나다(失婢)」
�삼명시화(三溟詩話)�에 실려 있는 작품이다. 조선 후기에는 노비가 도망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도망간 노비에 대한 자신의 감회를 시로 쓰거나, 다른 사람의 노비가 도망쳤을 경우 위로나 격려 차원에서 써준 시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이 시에서는 한꺼번에 달아난 두 명의 계집종을 향한 섭섭한 감정을 숨기지 않고, 엉망이 된 일상을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있다. 당(唐)나라 문인 소영사는 10년 동안 매질을 하며 하인을 가혹하게 다루었지만 도망가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 도망갈 것을 권하자 하인은 “내가 도망을 못 가는 것이 아니라, 소영사의 재주를 사랑하기에 도망가지 않는 것이다”라고 했다. 이희사는 하인을 잘 건사하지 못한 자괴감을, 자신의 문재(文才)에까지 연결하여 자책하고 있다.
[1]
잘 달리는 천리마와 같지 말고 勿如千里馬
변변찮은 개와 같아야 하리. 須如下質狗
가끔씩 변방에서 사라짐보다 有時塞上亡
문 앞에서 개처럼 지킴만 못하리. 不若門前守
[2]
나가서는 우물 안의 표주박 되고 出爲井中瓢
들어와선 부엌 안 빗자루 돼라. 入爲竈中帚
죽을 때까지 물 긷고 불 때게 되어 畢生供汲炊
머리와 배가 타고 썩어야 되리. 頭腹從焦朽
_이서우(李瑞雨), 「노비가 도망할 계책이 있었다. 장난삼아서 읊는다(奴婢有逃計 戱吟)」
노비는 보통 친인척의 거주지로 도망쳤는데, 대개는 다른 상전을 찾아 의탁하게 된다. 도망간 노비의 행적을 찾았다 해도 다시 되찾아오는 추쇄(推刷)의 과정은 그리 만만치 않아서 오히려 살해를 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당장 찾기가 곤란할 경우나, 사망한 것이 분명한 경우에는 호구단자에 기록하여 후일 되찾아 올 수 있는 근거를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노비를 되찾으려면 도망친 고을 수령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그래서 고을 수령과 아는 사람들을 수방해서 청탁의 편지를 넣도록 했다.
그렇다면 노비들은 왜 도망쳤을까? 보통 조선 전기까지 사노비는 상전에게 신공을 바치기만 했으나, 후기에 들어서면서부터 군역을 포함한 각종 역과 세금을 부과했다. 이를 도저히 감당할 수 없게 되자 도망을 택하게 된 것이다.
주인 입장에서는 한창 일손이 달려 고생할 때 하루아침에 달아나버리니 난처할 만도 하다. 게다가 나름대로 정성껏 대했다 싶었는데 온다간다 인사말도 없이 사라지니 배신감이 들 수밖에 없다. 아주 뛰어난 자질이 있어도 금세 사라져버리는 천리마보다는 빠릿빠릿하지 않아도 문 앞을 지키는 변변찮은 개가 낫다고 했다. 또한 어디에 있든 표주박이나 빗자루 신세처럼 평생 일만 하다가 죽으라며 저주에 가까운 악담을 퍼붓고 있다. 배신감에 뒤틀린 주인의 심사를 숨김없이 드러난다.
도망간 계집종 나이 겨우 열 여덟아홉 逃婢年纔十八九
이유 없이 맨몸으로 밤중에 달아났네. 無端隻身半夜走
하나는 귀머거리 하나는 절름발이 一婢耳聾一婢跛
늙은 아내 양손을 다 잃은 것 같았다네. 老妻如失左右手
여러 해 가난한 집, 고락 함께했는데 多年貧家共苦樂
평소 은의(恩意) 박했던 일, 스스로 부끄럽네.尋常自愧恩義薄
9월이라 겨울옷 아직 주지 못하여서 九月寒衣猶未授
눈바람 쌀쌀하게 맨발을 때릴 테지. 雪風凄凄吹赤脚
착한 새가 나무 택함 어느 누가 막으리오. 良禽擇木誰能禁
눈웃음 잘 웃으며 바느질 잘했었지. 雙眸巧笑能縫鍼
네 아비 해매이고 네 어미 울지만은 汝父彷徨汝母泣
감쪽같이 숨었는데 어디에서 찾을 텐가? 翔羽潛鱗何處尋
긴 행랑 밝은 달에 화각의 봄인데 長廊明月畵閣春
어디서든 뜻대로 몸이나 편했으면 隨處得意可安身
먼 훗날 만난대도 피하지 말자꾸나. 他日相逢休相避
나 또한 옛 주인이라 말하기 창피하니. 我亦羞稱舊主人
_변종운(卞鍾運), 「도망간 계집종(逃婢)」
가뜩이나 어려운 살림에 계집종이 두 명이나 도망갔다. 한 명은 귀머거리, 한 명은 절름발이. 이 불쌍한 아이들은 무엇이 급했는지 아무것도 챙겨가지 않았다. 두 아이 없이 고생할 늙은 아내도 걱정이지만, 이 추운 날씨에 신발도 챙겨 신지 못하고 달아난 것이 자꾸 마음에 걸린다. 화가 날 법도 하지만 어디서든 다시 만나게 되면 피하지 말자는 말도 잊지 않았다. 원망보다는 좀 더 은의(恩意)를 베풀지 못한 아쉬움을 토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