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食色紳言』,[明]龍遵 著
[20] 생물(生物)을 먹지 않은 소동파
동파가 이르렀다. “내가 젊었을 때 살생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이때에 끊지는 못하다가, 근년부터 비로소 돼지나 양을 죽이지 않을 수가 있었다. 그러나 성품이 게와 조개를 좋아하여서 살생하는 것을 면치 못했다.
작년에 죄를 지어서 처음에는 죽기를 면하지 못할 것 같다가, 곧바로 풀려나게 되어서 드디어 이때로 부터는 다시는 하나의 생물(生物)도 죽이지 않았다. 보내주는 게나 조개가 있으면 강 가운데에 놓아 주었다. 비록 살아날 이치는 없지만, 부디 만에 하나라도 살기를 바랐으니 곧 살아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삶아 먹는 것보다는 낫다.
바라는 것이 있어서는 아니지만 다만 직접 환란을 겪은 것은 닭이나 오리가 푸줏간에 있는 것과 다를 것이 없었다. 그러니 다시는 내가 입맛을 취하고 배를 채우려는 까닭으로 생명이 붙어 있는 것들로 하여금 헤아릴 수 없는 고통을 두려워하는 일을 받게 하지 않았다. 하지만 능히 맛을 잊지 못해서 저절로 죽은 것을 먹는 것이 한스러웠다.”
東坡云: “餘少時不喜殺生, 時未斷也, 近年始能不殺豬羊, 然性嗜蟹蛤, 故不免殺. 自去年得罪下獄,始意不免, 即而得脫, 遂自此不復殺一物. 有餉蟹蛤者放之江中, 雖無活理, 庶幾萬一, 便不活, 愈於煎烹也. 非有所覬, 但已親歷患難, 不異雞鴨之在庖廚, 不復以口腹之故, 使有生之類, 受無量怖苦爾. 猶恨未能忘味, 食自死物也.”
[평설]
소동파는 원래부터 살생을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완전히 끊지는 못했다. 어느 동물도 죽이지 않고 살아가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다 정치적 사안에 휘말려 죽을 뻔하다, 살아난 뒤로부터는 완전히 살생에서 손을 떼게 되었다. 생각해보니 자신의 처지가 푸줏간에서 언제 죽을지 모르는 닭이나 오리와 다를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죽음에 근접했던 경험은 일순간에 진일보한 사유를 가능케 한다. 고통을 겪어 본 자 만이 가지는 시야의 확대다. 소동파는 그 뒤로 죽은 것을 먹는 데에도 아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