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로 보는 일상의 재발견 –자음과 모음 근간-
매미는 짧게는 5∼7년, 길게는 17년 동안 굼벵이 상태로 지낸다. 그러다 지상에서는 고작 2주 정도 울고 짧은 생을 마감한다. 지상에서의 삶보다 지하에서의 삶이 더 긴 슬픈 곤충이다. 매미나 인간이나 세상에 허락된 성충(成蟲)의 시간은 너무도 짧다. 그래서 매미는 지하철 소음과 맞먹는 소리로 더 필사적으로 울어대는 지도 모른다. 매미를 보면 영화 빠삐용(1973)에 나오는 마지막 대사가 생각이 난다. “이 망할 놈들아 나 이렇게 살아 있어(Hey you bastards! I'm still here!)”
해 저물면 모두 다 쉬기 마련인데
너만 어이해 울기를 멈추지 않나
내일이 있다는 것 잘 알면서도
오늘이 저무는 건 애석한 일일 테지
日入群動息 胡爾啼不住
固知明日有 且惜今日暮
이양연(李亮淵), 「저녁 매미[暮蟬]」
제목이 저녁매미다. 저녁과 매미가 만나면서 격렬하게 화학반응을 한다. 저녁은 하루가 저물어 가는 시간이고 매미는 하루가 아쉬운 곤충이다. 매미에게 하루는 인생으로 따지자면 적지 않은 시간임에 분명하다. 이 때문에 매미는 지상의 모든 것이 쉴 시간 임에도 쉬지 못한다. 오늘은 그 자체로 불가역적인 소멸이기 때문에 내일이 꼭 희망이 되지는 못한다. 인간은 내일이 아니라 단지 오늘만 살 뿐이다. 그래서 오늘이 사라지는 것은 인생의 한 켠이 무너져 내리는 것과 다름없다. 시인은 매미를 통해 아무나 쉽게 읽어내지 못하는 삶의 의미를 통찰하고 있다.
잠깐의 세월일랑 흘러가는 물과 같아
태어나서 봄가을도 알 길이 하나 없지.
비록 지금 천지간에 소리가 꽉 찼지만
다만 이 몸뚱이는 오랫동안 못 머문 다오.
一片年光似水流 生來未許識春秋
縱然聲滿今天地 只是形骸不久留
정약용(丁若鏞), 「매미에 대하여. 절구 삼십 수를 읊다[蟬唫三十絶句]」
다산은 매미에 관해서 무려 30수의 시를 남겼다. 그는「더위를 없애는 여덟 가지 일[消暑八事]」이라는 8편의 시 중 한 편에서 매미를 소재로 시를 썼다. 동쪽 숲에서 매미 소리를 듣는 것[東林聽蟬]이 더위를 잊게 해주는 특효약이었던 셈이다. 매미는 여름 한 철을 세상이 떠나가도록 울다가 봄과 여름이 있는 줄도 모르고 사라진다. 시인은 매미를 보면서 인간의 삶도 이와 다름이 없다는 생각을 한다. 인간은 잠깐의 삶에다 불가지(不可知)의 운명을 타고 나왔다. 그래서 태어났지만 슬픈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인간은 잠깐 한 철만 시끄럽게 악다구니를 치다가 우주의 적막 속으로 사라지는 존재이다. 이처럼 시인은 시끄러운 소음에서 광대한 적막을 읽어냈다.
수놈 암놈 번갈아서 시끄럽게 울어대니
정원에서 들리던 소리 정자로 옮겨갔네.
아마도 옥황상제가 적막함 불쌍히 여겨
잠시 하늘 음악 나누어 서생에게 주었나 보다.
雄吟雌唱迭相鳴 纔聽南園又北亭
疑是玉皇憐寂寞 暫分天樂餉書生
이응희(李應禧), 「매미 소리를 듣다 2수[聞蟬 二首]」
소리는 살아 있음을 적막은 죽어 감을 증거한다. 우주는 소리도 산소도 없다. 영화 그레비티(Gravity, 2013)에서 주인공이 갖은 노력 끝에 지구로 귀환했을 때, 처음 들려오는 지구의 소리는 어머니 자궁 밖으로 처음 나온 것을 알리는 것 같았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집은 그야말로 적막강산이다. 그것은 나의 존재가 잊혔거나 사라져 버림을 의미한다. 이때 들려오는 매미의 요란한 소리는 더 이상 소음이 아니라, 자신의 유폐(幽閉)를 위로해 주는 옥황상제의 선물로 느껴진다.
육운(陸雲)은 매미를 두고 오덕(五德: 文·淸·廉·儉·信)을 갖춘 곤충으로 보았다. 이덕무는 매미와 귤의 맑고 깨끗함을 사랑하여 ‘선귤당(蟬橘堂)’이란 당호(堂號)를 썼다. 선비들에게 매미는 고상한 곤충이었다. 실제로 매미의 성충은 야외에서 한 달쯤 활동하니 곤충류에서 단명(短命)하는 편에 속한다고 볼 수 없다. 하지만 매미가 고작 한 철밖에 살 수 없다는 사실은 강렬한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다. 매미를 보고서 누군가는 삶의 허무를, 다른 누군가는 남다른 지사(志士)의 의연함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