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로 보는 일상의 재발견 –자음과 모음 근간-
다른 질병보다 눈병은 더욱 고통스럽다. 하나의 감각이 차단되는 공포를 느끼기 때문이다. 게다가 독서가 일상인 선비들에게 눈병은 공부의 중단을 의미하니, 책을 읽지 못하는 시간은 살아있지 않은 시간과 다를 바 없었다. 그렇다고 눈병이 고통스럽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다른 감각기관이 새롭게 열리거나, 육안(肉眼)을 넘어서 심안(心眼)이 열리는 체험을 하기도 하였다.
내 병은 하늘이 내린 것인데
꽃구경 뉘 못하게 하였으랴
하늘 이미 날 불쌍히 안 여기노니
봄도 따라서 나를 저버리었네.
하늘 이미 꽃 피우는 권한 있으면서
어찌 내 눈은 환히 하지 못하나
病是天之爲 看花誰所破
天旣不吾憐 春亦孤負我
已有開花權 開目何未可
이규보,「눈병으로 꽃구경은 못하고 탄식만 하다[病眼未看花有嘆]」
이규보는 소갈증, 수전증, 피부병, 눈병 등 갖가지 질병에 시달렸다. 특히, 그는 눈병에 대해서 여러 편의 시를 썼다. 세상을 뜨기 삼일 전까지도 눈병의 고통에 대해 말했다. 위의 시는 눈병 때문에 꽃구경을 망친 심경을 적은 것이다. 자신의 눈병은 하늘이 내린 것이어서 어쩔 수 없다. 하지만 한 해에 잠시 허락되는 꽃구경을 할 수 없는 것은 야속하기 짝이 없다. 왜 하늘은 이 아름다운 꽃을 주재(主宰)하는 권능(權能)을 가졌으면서, 자신의 눈병은 이처럼 방치하고 있나? 결국 세상은 꽃잔치인데 자신은 암흑천지로 만든 하늘을 원망하고 있는 셈이다.
늙어 가면 병들게 마련이지만,
한평생 포의로다 지낼 줄이야.
눈 어른거려 뵈지 않는 게 많고
눈동자에 드는 광채 적어졌도다.
등불 앞 글자처럼 희미하였고
눈 온 뒤 햇빛처럼 눈이 부시네.
과거 발표 보기를 기다린 뒤에
눈감고 들어앉아 세상 일 잊으리
老與病相隨 窮年一布衣
玄花多掩映 紫石少光輝
怯照燈前字 羞看雪後暉
待看金牓罷 閉目坐忘機
오세재(吳世才),「아픈 눈(病目)」
이때 그는 과거시험에 여러 번 떨어진 상태였다. 그의 삶은 불행의 연속이었다. 세 번 장가를 들었지만 그때마다 아내는 그를 버리고 떠났다. 아들도 없고 땅 한 떼기 없었으며, 생계마저 위협받는 그런 상태였다. 늙어가며 병까지 더쳤지만, 여전히 포의의 몸도 벗어나지 못했다. 눈은 제구실을 하지 못한 지 오래되었다. 과거시험 합격자 명단만 볼 때까지 눈이 버티어 주길 바랐다. 눈이 정말 아팠지만 그보다 마음이 더 아팠다. 내 스스로 세상을 보지 않으려 눈을 먼저 감아 버린다고 결심한다. 아픈 눈에 대한 불편함 보다는, 눈 밝은 나를 업신여기는 눈 어두운 자들에 대한 분노는 아니었을까.
변방이라 이런저런 약재 모두 부족하니
눈병 나도 손 못 쓰고 마음까지 아프구나.
눈 조금 어두워도 태식(胎息)에는 무방하니
빛 보게 되더라도 다시 외물 안 끌리리.
흑백 분간 못하나니 시세와 부합하고
미추를 안 따지니 만물과 친화하네.
그저 아쉬운 건 안개 속 강산이라
눈앞에서 금년 봄을 잃게 되는 일이라네.
邊城藥料乏君臣 阿睹生菑坐損神
向晦不妨胎息事 回光非復外淫人
無分黑白應時合 少撿姸媸與物親
只惜江山煙霧裏 當前又失一秊春
노긍(盧兢), 「차운하다[次韻]」
위원(渭原) 땅으로 유배를 오게 되어 약을 구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눈병이 악화되어 정신까지 이상하게 될 것만 같다. 눈이 안보여도 할 수 있는 호흡법에 집중하며, 그동안 너무 눈의 속임에 빠져 살아왔음을 깨닫게 된다. 눈이 안 보이면 꼭 나쁜 일만은 아니어서 시비(是非)와 미추(美醜)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이렇게 눈이 어두워지는 대신 심안(心眼)이 밝혀지는 것이다. 다만 잠시 허락된 빛나는 봄 경치를 만끽할 수 없음이 아쉬웠다면 아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