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로 보는 일상의 재발견 –자음과 모음 근간-
70년대까지만 해도 얼음가게가 있었다. 사람들은 여름이면 새끼줄에 얼음을 묶어서 사가지고 오곤 했다. 그보다 훨씬 앞선 조선시대에 얼음은 더욱 귀한 물건이었다. 관청에서는 겨울에 얼음을 확보하여 보관해 두었다. 대개 얼음을 캐는 채빙(採氷)과 잘라낸 얼음을 소달구지로 옮기는 운빙(運氷), 얼음을 쌓는 장빙(藏氷) 등 세 과정으로 이루어진다. 얼음을 캐는 채빙은 벌빙(伐氷) 또는 착빙(鑿氷)이라고도 한다. 채빙은 고되고 힘든 일이라서 채빙과정에서 목숨을 잃는 일도 허다했다. 얼음은 한강상류, 계곡의 하천, 경회루에서 캐냈다. 여름이 되면 각사와 정2품 이상 관원들에게 얼음을 나누어주는 반빙(頒氷)이 진행되었다.
얼음을 꽝꽝 캐내는 수고로움은
옛날에 주공의 시에서 들었다네.
이 때 당해 몸소 친히 보게 되노니,
백성들이 참으로 슬퍼보였네.
2월달에 추위가 매서운 날에
백성들은 추운데도 옷이 없었네.
얼음은 미끄럽고 손가락은 빳빳이 굳어,
도끼 자루 손에서 자주 놓치네.
얼음 잘라내기에 온힘 다 쓰니
공사(公事)에는 정한 시기 있어서이네.
노인이 등에 짊을 면치 못하니
하물며 누더기 옷 입은 아이임에랴.
그 빙고(氷庫)는 깊이가 얼마나 되나.
하늘 어둡고 눈은 펄펄 내리네.
저택에서 음료수를 마실 때에는
이런 추위와 주림 생각하겠나.
鑿氷冲冲勞 昔聞周公詩
及玆身親見 小民良足悲
栗烈二之日 白屋寒無衣
氷滑指爲直 斧柯落多時
斲出無餘力 公事有定期
斑白不免負 矧伊百結兒
凌陰深幾許 天暝雪霏霏
華廈吸漿時 能念此凍饑
김시보(金時保),「얼음을 뜨다[伐氷]」
얼음을 뜨는 일은 중노동이었다. 동상은 기본이었고 얼음이 깨져서 죽거나 얼음을 캐낸 구멍에 빠져 죽는 사람들도 많았다. 옷도 변변히 갖추지 못하고 혹한의 추위에 노소를 따질 것 없이 동원되었다. 이렇게 얼음 한 덩이를 얻으려면 많은 사람들의 고생과 함께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만 했다. 그러나 얼음을 캐내느라 노동한 사람은 여름에 정작 얼음을 먹을 수 없고, 화려한 집에 잘난 사람 몫이 된다.
얼음을 캐는 과정인 착빙을 다룬 시들은 너무나 많다. 대개 시의 앞부분에서는 고단한 채빙의 과정을, 뒷부분에서는 여름에 얼음을 즐기는 유력가들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노동에 종사하는 사람들과 노동으로 인해 생산된 물품들을 향유하는 사람들의 극명한 대비를 보여줌으로써 사회의 모순을 드러냈다.
동빙고, 서빙고에 얼음 뜬 것 있으니
각사에 목패 하나 나누어 주었다네.
궁궐에 바친 공물 여파가 미치나니
조각조각 베푸신 은혜 더위를 물리치네.
伐氷凌室有東西 頒賜諸司一木牌
大內日供餘派及 恩霑片片暑熱排
홍석모(洪錫謨),「얼음을 나누어주다[頒氷]」
얼음을 벼슬아치에게 하사하는 것을 반빙(頒氷) 또는 사빙(賜氷)이라 불렀다. 목패를 가져가면 빙고에서 얼음을 나누어주었다. 대부분 벼슬아치에게 나누어 주었지만 이따금 죄수나 환자에게도 지급되기도 했다. 여름철 얼음은 여러모로 요긴하게 쓰였다. 음식이 상하는 것을 예방하거나 질병을 막는데 사용되었고 제수용품이 상하는 것을 방지해 주기도 했다. 또, 얼음을 개인적으로 선물하기도 했다. 조임도(趙任道)의「황낙부 협이 얼음을 보낸 것에 감사하다[謝黃樂夫 悏 送氷]」에서 “한 조각 맑은 얼음 내 목을 시원케 하니 삼복의 찌는 더위 만추처럼 변하였네. 친구의 후의에는 무엇으로 보답할까 평생 친하게 지낼 것을 더욱 원하네.[一片清氷爽我喉, 三庚苦熱變霜秋. 故人厚義將何報, 更願平生契約修]”라 나온다.
광복이 된 후에 강물이 오염되자 정부는 1948년부터 한강 얼음을 먹지 말라고 경고했지만 6·25전쟁 중에도 채빙은 멈추지 않았다. 결국 1955년부터는 얼음 채취 자체를 금지했다. 그 뒤 한강의 수질 악화와 개인 냉장고의 보급으로 인해 한강에서 채빙하는 모습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