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로 보는 일상의 재발견 –자음과 모음 근간-
노처녀
조선 시대에 노총각, 노처녀 문제는 국가의 중대한 문제로 파악됐다. 암행어사의 임무 중 하나는 노총각, 노처녀를 찾아서 성혼시키는 일이었다. 1791년 정조는 한양에서 결혼 못 한 노총각, 노처녀를 조사하게 했더니 총 281명으로 파악됐다. 석 달 만에 남녀 한 명씩을 제외하고 모두 성혼을 시켰다. 28세의 노총각 김희집과 21세의 신씨가 마지막으로 남았는데 이 두 사람이 혼인하는 것으로 아름답게 마무리되었다.
이 두 사람의 결혼 이야기는 이덕무의「金申夫婦傳」과 이옥의「東床記」에 실려 있다. 특히「동상기」에는 노처녀 신씨 마음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 나온다. “더는 참을 수 없어 측간으로 달려가 가만히 개를 불러 말하였다. ‘멍멍아, 내가 내일모레면 시집을 간단다.’…단지 하품만 한 번 하니, 그 처녀 민망하고 민망하여 또 개를 보고 말하였다. ‘멍멍아, 내가 너에게 허황된 말을 할 것 같으면 내가 너의 딸자식이다.’” 한시에도 노처녀의 답답하고 복잡한 심경을 담은 시들이 남아 있다. 어떤 시들이었을까?
스스로 홍안 아껴 고이고이 간수해도
거울 속 비친 눈썹 아무도 보지 않네.
원망스럽네. 세월이 훌쩍하고 지나가서
규방의 사람 위해 잠시도 머물 줄 모르는 게.
自惜紅顔好護持 無人看取鏡中眉
生憎歲月堂堂去 不爲空閨駐少時
-오상렴(吳尙濂, 1680~1707), 「노처녀(老處女)」
젊디젊은 얼굴을 잘 관리했다지만 거울 속에 비친 모습은 나이 든 기색이 역력하다. 어느새 세월은 훌쩍 흘러가서 아무도 자신의 얼굴을 쳐다보지 않게 되었다. 무정한 세월을 탓해보지만 어쩔 수는 없는 일이다. 인간은 잠시 예쁜 얼굴과 몸을 허락받을 뿐, 볼품없는 용모로 오랜 기간을 지낼 수밖에 없다. 이 시의 주인공은 무정한 세월 속에 한창 때와 달라진 용모를 탄식하고 있다.
가난한 집 남자 배필 되지를 마오
어린놈에게 시집도 가지를 마오.
생계며 가사 일은 어찌할 수 없나니
네 한 몸 그르침은 남자에게 달렸다네.
戒君勿配貧家夫 戒君勿適冲年夫
治生辦事均無奈 誤汝一身摠在夫
-육용정(陸用鼎, 1843∼1917),「노처녀의 노래[老處女吟]」
이 시는 모두 3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중 한 편이다. 가난한 남자에게 시집가면 먹고살 일이 걱정이고, 어린 남자에게 시집가면 온갖 일을 챙겨주어야 한다. 이 사람은 이래서 걸리고 저 사람은 저래서 걸린다. 돈 많고 나이 지긋이 먹고 거기다 얼굴까지 잘난 사람은 벌써 다른 사람들의 짝이 되었는지 눈에 띄지 않는다. 차라리 가난하거나 어린 사람에게 시집가야 할 바에는 차라리 혼자 사는 것이 나을 판이다. 나의 짝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정월 대보름 달빛 매우 맑고 둥근데
달 먼저 보게 되면 아들을 낳는다네
도대체 어인 일로 남쪽 이웃 노처녀는
등 돌리고 말도 없이 눈물 줄줄 흘리는가?
元宵月色劇淸圓 先見生男古老傳
底事南隣老處子 背人無語淚泫然
-김려(金鑢, 1675∼1728), 「上元俚曲」중 한 편.
정월 대보름에 대보름달을 남들보다 먼저 보면 아들을 낳는다는 속설이 있었다. 그래서 부인들은 대보름달을 먼저 보려고 다투곤 했다. 그런데 남들은 대보름달을 서로 먼저 보려고 정신이 없는데, 노처녀는 웬일인지 등을 돌린 채 말도 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다. 왜 그럴까? 하늘을 봐야 별을 따지. 남들 다하는 결혼도 못 한 신세가 못내 서러워서 그렇게 울고 있었다. 혼기를 놓친 노처녀의 답답한 심정을 잘 담고 있다.
어찌 인물이 남보다 빠진다 하랴
바느질도 잘하고 길쌈도 잘하지만
어려서부터 가난한 집에서 자라
중매쟁이는 나를 몰라 준다네.
豈是乏容色 工鍼復工織
少小長寒門 良媒不相識
-허초희(許楚姬, 1563-1589),「가난한 여인의 노래[貧女吟]」
이 시는 모두 4수다. 얼굴도 예쁘고 솜씨도 있었지만 가난한 집이라 중매쟁이가 선뜻 혼처를 마련해주지 않는다. 나머지 3수의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종일 베만 짜는 노처녀가 있었다. 베를 짜서 완성해도 자신의 몫이 아니라 팔자 좋은 아가씨 혼수 갈 때 가져갈 물건이 된다. 남들 시집갈 때 가져갈 옷을 짓지만 정작 자신은 노처녀 신세를 벗어날 수 없었다.
요즘은 만혼(晩婚)이 대세라서 어지간한 나이라도 노처녀란 이름을 붙이기 어렵다. 조선 시대에는 보통 15살을 전후해 결혼하는 조혼 풍습이 일반화해 되어 있어서, 20살을 넘기면 노처녀로 간주하였다.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빨리 노처녀가 되었고, 일단 노처녀가 되면 시집가기도 쉽지 않았다. 예외적이긴 하지만 당찬 노처녀도 존재했다. 조수삼의『추재기이(秋齋紀異)』를 보면 나이가 쉰이나 먹은 삼월이란 노처녀가 나온다. 처녀처럼 화장을 하고 엿을 팔아 생계를 꾸리며 “온 세상 남자가 다 내 남편”이라고 호기롭게 말하곤 했다. 그런데 당시 대부분의 노처녀는 잉여(剩餘)의 존재로서 아픈 마음을 스스로 달래야 했다.
예전의 노처녀를 지금의 노처녀와 비할 수 없다. 지금은 노처녀란 말도 거의 사용하지 않는 말이 되어버렸다. 혼기를 늦추는 것이 자발적인 선택이기 때문이다. 예전에 결혼이 나이만 차면 누구나 끝내야 하는 숙제였다면 이제 결혼은 자신의 진정한 짝을 찾기 위해 유예할 수도 있고, 여의치 않다고 결혼을 포기할 수 있게 되었다. 결혼 자체가 필수에서 선택의 문제로 뒤바뀐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