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로 보는 일상의 재발견 –자음과 모음 근간-
기다림
우리는 언제든 상대에게 연락할 수 있다. SNS, 휴대폰, 이메일, 모바일메신저 등 서로 연락할 수 있는 통로는 수없이 많아졌다. 그렇지만 우리는 예전보다 상대방과 더욱 가까워졌을까? 우리는 상대방과 늘 끊겨져 있지만 이어져 있다고 착각한다.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황지우의 시「너를 기다리는 동안」의 일부다. 기다림은 고통스럽지만 내 마음에 그대를 깊이 뿌리 내리게 한다. 우리는 누군가를 간절히 기다려 본 적이 있는가?
오신다고 약속하고 어찌 늦으시나
뜰에 핀 매화도 지려 하는 이때에.
가지 위 까치소리 갑자기 들리기에
헛되이 거울 보며 눈썹을 그린다오.
有約來何晩 庭梅欲謝時
忽聞枝上鵲 虛畵鏡中眉
-이옥봉(李玉峯, 1550-1600?),「여인의 마음(閨情)」
당신은 봄이 되면 오신다더니 봄이 되어도 오시지 않는다. 매화는 추위가 가시기 전에 폈다가 3월이면 만개하고 이내 저버린다. 어느 꽃보다 잠깐 피었다 빨리 진다. 꼭 당신과 나의 사랑과 닮았다. 이제는 체념하고 포기해야 하나 생각했는데 갑자기 가지 위에서 까치가 울어댄다. 까치가 울면 좋은 소식이 있다는 데 님이 오시는 것은 아닐까? 조용히 거울을 보면서 눈썹을 그려본다. 그새 얼굴은 너무나 까칠해져 있다. 당신은 오지 않을 것이나 혹시나 하는 마음에 또 한 번 기대를 건다. ‘헛되이[虛]’라는 단어에서 스스로도 자신의 기대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다.
님은 서울 계시고 전 양주에 있어서
날마다 님 생각에 누각에 올라와요.
풀포기 웃자라고 버들은 시드는데
저물녘 한양 가는 강물만 보이네요.
君居京邑妾楊州 日日思君上翠樓
芳草漸多楊柳老 夕陽空見水西流
-최경창(崔慶昌, 1539-1583),「제목 없음(無題)」
제목이 없는 시다. 차마 붙일 수 없는 제목에 더 많은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 님은 서울에 있고 자신은 양주 땅에 있다. 님 생각이 간절해져 매일매일 누대를 찾는다. 혹시나 님이 오시는 순간을 놓칠까 하염없이 서울 쪽을 바라본다. 풀포기는 그리움처럼 그새 쑥 자라있고 버들은 시들어서 재회의 기대를 무색케 한다. 하염없이 누대에 있다 보니 하마 저녁이 되어 버렸다. 서울 쪽으로 흘러가는 물은 님을 볼 수 있을테지.
낭군께선 달뜨면 오신다더니
달떠도 낭군께선 아니 오시네
아마도 우리 낭군 계신 곳에는
산이 높아 달뜨기 더딘가 보네
郞去月出來 月出郞不來
相應君在處 山高月出遲
–능운(凌雲, ?∼?),「낭군을 기다리며[待郞]」
그대가 오신다는 시간이 훌쩍 지냈다. 이렇게 휘영청 달이 진작 떴건만 그대는 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혹시나 그대가 계신 곳에는 달 더디 떠서 그런가 짐작해 본다. 아마 그대도 달을 보았을 것이 분명하다. 그대가 오지 않을 것이 확실한데도 자꾸만 그럴만한 사정이 있으리라 헤아려본다. 기대를 담은 헛된 바람에 몸을 기댄다. 그대는 늦게라도 찾아왔을까?
요즈음 안부가 어쩌신지 묻습니다
달빛 창가 비치노니 제 슬픔 많답니다
꿈 속 혼이 다닌 길에 자취를 남겼다면
문 앞에 돌길 절반 모래가 됐을테죠.
近來安否問如何 月到紗窓妾恨多 .
若使夢魂行有跡 門前石路半成沙
이옥봉(李玉峯, ?∼?),「꿈 속의 혼[夢魂]」
이 시는 서녀였던 이옥봉이 쓴 것이다. 이옥봉은 남편인 조원에게 내쳐진 후 그리운 마음을 시에다 담았다. 당신은 어찌 지내는지 궁금하지만 당신에게 물을 길이 없다. 내가 슬픈 것처럼 당신도 조금은 마음이 슬프지 않을까? 매일 매일 당신의 꿈만을 꾼다. 어찌나 많이 꿈속에서 당신의 집을 오고갔는지 실제라면 당신 집 앞 돌길이 모두 내 발길에 닳아서 모래가 되었을 것이다. 애절한 사연을 담고 있어 뒤에 수심가의 가사가 되어 입으로 전해졌다.
이제 누군가를 진정 기다리지도 기다려주지도 않는다. 우리는 기다림이 없는 세상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기다림은 상대를 기다리다 그리워하다 원망하다 미워하다가 걱정하다가 체념하다가 다시 몸뚱이를 불려서 더욱 상대를 사무치게 기다리게 한다. 그래서 원망과 미움은 걱정과 그리움에 자리를 내어준다. 그대가 무사히만 돌아와 내 곁에 있어주기를 간절히 바래본다. 내 곁에 오셔서 오래도록 함께 있어 주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