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로 보는 일상의 재발견 –자음과 모음 근간-
친구를 기다리며
세상에 많은 인간관계 속에 친구처럼 소중한 것도 없다. 마음에 맞는 친구가 몇 사람만 있어도 삶은 훨씬 풍성해질 수 있다. 나이가 들면서 점점 친구들의 숫자도 줄어가고 친구에 대한 기대도 사뭇 달라졌지만 여전히 친구란 소중한 존재다. 특별한 이유가 없어도 만나서 별다른 말을 나누지 않는 친구는 얼마나 소중한가? 옛 사람들은 친구를 그리워하며 기다렸다.
눈빛이 종이보다 새하얗기에
채찍 들어 내 이름 써 두고 가니
바람아 부디 불어 땅 쓸지 말고
주인이 올 때까지 기다려다오.
雪色白於紙 擧鞭書姓字
莫敎風掃地 好待主人至
이규보(李奎報, 1168~1241),「눈 내리는데 친구를 찾아갔다가 만나지 못하고[雪中訪友人不遇]」
사전에 약속도 없이 눈 속에 말을 타고 친구를 찾아갔다. 마침 친구는 집을 비운 채 어딘가 외출을 나가고 없다. 빈 집에서 얼마나 기다렸을까? 눈이 쌓여 집 마당이 마치 새하얀 캔버스 같다. 말채찍을 들어서 자신의 이름 석 자를 쓰고는, 바람에게 이름을 지워 주지 말아 달라는 헛된 부탁을 하면서 집을 떠난다. 내가 친구를 만나지 못한 것이나, 친구가 내가 온 줄 모르는 것이나 크게 개의치 않는다. 내 마음에 결코 지워지지 않을 친구의 이름 석 자를 새기고 돌아왔으니.
비 개자 온 뜰에는 새 이끼 자라나고
책상에 진흙 떨어지니 어미 새끼 돌아왔네.
잡생각 그지없다 어느새 슬퍼지니
그늘에서 하루 종일 그대 오길 기다렸소.
一庭晴雨長新苔 泥墜書床乳燕回
閑思悠悠却惆悵 綠陰終日待君來
-백광훈(白光勳, 1537∼1582),「양천유에게 부치다(寄梁天維)」
봄이 되면 다시 친구를 만나리란 희망 하나로 한겨울도 참아냈다. 그런데 봄비가 한차례 지나가서 이끼들은 웃자라 있고, 돌아온 제비는 둥지를 짓느라 분주하다. 이런저런 생각들이 스쳐 지나가다가 갑작스레 서글픈 마음이 든다. 봄이 왔는데도 그대는 날 찾지 않고 있다. 온종일 그대만을 기다리다 하루가 지난다. 봄이 와도 재회(再會)를 이루지 못할 때의 실망은, 겨울 동안 버티어 냈던 격절(隔絶) 시간들 보다 괴롭다.
완성(莞城) 땅에 내리던 비 막 그치게 되자
해질녘 가을 산은 담백하였네.
좋은 기약 강 건너 포구에 있어
물가 구름 어우러진 곳 바라만 보네.
莞城雨初歇 落日淡秋山
佳期隔江浦 望望水雲間
-안민학(安敏學, 1542-1601),「약속해 놓고 오지 않아(期不至)」
하루 종일 퍼붓던 빗줄기가 해질녘에 잦아들자 가을 산은 새로 목욕한 듯 깨끗해졌다. 이때다 싶어 약속 장소인 포구로 발을 옮겼다. 그러나 친구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대가 구름이 자욱이 낀 강을 건너오는지 하염없이 바라다 본다. 비가 온 것이 대수인가? 그대도 비를 뚫고 와주길 바랬는데, 기대는 어긋나 버렸다. 모르겠구나. 그대도 나처럼 늦더라도 찾아와줄지, 내가 오지 않을 줄 지레 짐작하고 오지 않을는지.
젊어서 단주 하려 다짐 했건만
중년 들어 술 잔 잡길 좋아하였네.
술이란 것이 어찌 그리 좋은가
가슴 속에 응어리가 있어서겠지
오늘 아침 마누라 귀띔해주길
작은 독에 새 술이 맛들었다고
혼자서 마시기에 흥이 미진해
자네가 찾아오길 기다린다네.
早歲欲止酒 中年喜把盃
此物有何好 端爲胸崔嵬
山妻朝報我 小甕潑新醅
獨酌不盡興 且待吾友來
박은(朴誾), 「열흘 동안이나 장마가 계속되어……[霖雨十日 門無來客 悄悄有感於懷 取舊雨來今雨不來爲韻 投擇之乞和示]」
젊어서는 술을 끊는다고 다짐한 적도 있었지만 중년이 되자 홀짝홀짝 술 먹기를 좋아하였다. 술이 좋은 것이 아니라 가슴 속에서 천불이 나서였다. 오늘 아침 마누라는 새로 빚어 놓은 술이 잘 숙성되었다고 귀띔해줬다. 생각해보니 그동안 열흘이나 비가 퍼부어 사람들과 왕래하지 못했다. 우중에 마음 맞는 친구와 술잔을 기울일 생각에 벌써 마음이 달뜬다.
기다림 속에 친구를 만나면 그 자체로 즐겁다. 오랜만에 만나도 그동안의 단절이 느껴지지 않는다. 친구가 그저 들어만 주어도 위로가 된다. 누구라도 가끔 그런 친구를 만나 고해성사처럼 속마음을 쏟아내고 싶을 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