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와이, 괌, 뉴질랜드, 마다가스카르 언어는 모두 조상이 같다?
아프리카 남동쪽의 '마다가스카르' 섬과 태평양 한가운데의 '하와이' 제도는 말 그대로 지구의 정반대편에 있다.
지구 둘레가 4만 킬로미터 남짓 되는데 마다가스카르-하와이 거리는 무려 17,441km.
직선으로 지구 둘레의 44%에 육박하는 거리를 건너야만 오갈 수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마다가스카르의 '말라가시어'와 하와이의 '하와이어'는 조상이 서로 같다!
이들의 조상 언어는 약 5천 년 전부터 대만 섬에서 쓰였는데,
이 언어를 쓰던 사람들은 마치 디즈니 영화 '모아나(Moana)'에 나오는 것처럼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 여러 섬을 거쳐 새 거처를 개척했다고 한다.
아니, "마치 모아나처럼"이 아니라 사실 모아나 영화가 딱 이 사람들(의 후손들) 얘기다.
그들이 퍼져나간 곳은 주로 지금의 필리핀이나 인도네시아 등 대만에서 남쪽으로 쭉 이어진 섬들이었고,
거기서 다시 섬에서 섬으로 여러 집단이 다양한 방향으로 옮겨간 끝에,
대만 섬을 처음 떠나고서부터 시간이 4천 년쯤 흘렀을 무렵에는 아프리카의 마다가스카르 섬, 태평양의 하와이, 뉴질랜드, 이스터 섬까지 모두 이들의 터전이 되어 있었다.
지도에서 이상 이야기한 네 개 섬을 찍어서 사각형을 그려 보면 실로 어찌나 방대한 영역인지 느껴질 것이다.
By Pavljenko - Own work using:Map first shown in Bellwood et al. (2011) and taken from Benton et al. (2012), CC BY-SA 4.0,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116424449
(물론 지금처럼 항해술이 발달한 게 아니니 어떤 단일한 세력이 무슨 정복 전쟁이라도 하듯 영역을 넓힌 것은 아니고,
새로운 섬에 도착한 집단은 대체로 전에 살던 섬 사람들과 단절되어 저들만의 독자적인 삶을 살았을 것이다.)
사람을 따라 언어도 같이 전파되었다.
하와이어와 말라가시어의 공통 조상, 대만 섬의 그 언어는 수천 년 동안 많은 변형을 거치며 인도양과 태평양의 수많은 섬으로 퍼져나간 것이다.
이들이 자리잡은 수많은 섬들이 대체로 남쪽에 위치하기 때문에,
대만 섬의 조상 언어로부터 갈라져 나온 여러 언어들을 한 데 묶어 '남도어족(南島語族)'이라고 부른다.
다른 말로 오스트로네시아어족(Austronesian)이라고도 하는데, '오스트로네시아'라는 게 라틴어 auster '남쪽'과 그리스어 νῆσος(nêsos) '섬'에서 나온 말이니 결국 '남도南島'라는 뜻이다.
그리고 먼 옛날 대만 섬에서 쓰였을 이들의 공통 조상 언어를 '남도 조어(南島 祖語)', 또는 '오스트로네시아 조어(Proto-Austronesian)'라고 부른다.
(참고로 지금도 대만 섬의 원주민들은 상당수가 이 남도 조어에서 갈라져 나온 후손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즉 대만 섬 원주민 언어들은 하와이어, 마오리어, 인도네시아어 등의 친척 언어이다.)
위에서 이야기한 '말라가시어'와 '하와이어' 외에 남도어족에 속하는 유명한 언어를 대충 나열해 보자면 이런 언어가 있다.
타갈로그어(표준어로서는 '필리핀어')
말레이·인도네시아어('마인어', '말레이어', '인니어')
찌아찌아어 (!)
차모로어(괌 원주민 언어)
마오리어(뉴질랜드 원주민 언어)
이 모든 언어가 저 옛날 대만 섬에서 쓰이던 남도 조어의 후손, 친척 언어들이다.
유명한 언어덕후 유튜버 ILoveLanguages!의 채널에서 여러 남도어족 언어의 숫자 표현을 직접 들어 볼 수 있다.
https://youtu.be/TYEBCqSP61A?si=VdtSI4zjMpAo0nDy
(주인장 Andy가 필리핀 사람이라더니 필리핀어는 직접 녹음한 모양이다.)
숫자 표현 중에 '5'를 나타내는 'lima(리마)'는 유독 대부분의 남도어족 언어에서 큰 변형 없이 유지된 채로 계승된 단어이다.
그래서 남도어족 언어에 관한 영상 댓글에서는 언어덕후들이 막 'lima is eternal!(리마는 영원하다!)' 이런 댓글을 남기며 흥분하는 걸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한편 남도 조어의 '*lima'는 손(hand)을 나타내기도 했다는 모양이다.
신체부위 어휘와 수사 사이의 연관성에 대해서는 Heine(1997)의 Cognitive Foundations of Grammar를 읽어 보면 좋다.
https://www.youtube.com/watch?v=1w2SM46bPds
남도어족 언어 중에서도 비교적 최근에 갈라져 나온(?) 하와이어와 마오리어는 서로 꽤 비슷한 모습을 많이 엿볼 수 있는데, 마다가스카르만큼은 아니지만 이쪽도 거리가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새삼 신기하다.
앞으로 디즈니 영화 '모아나'를 볼 일이 있다면,
중국 대륙 옆의 작은 섬에서 출발한 사람들이 4천 년에 걸쳐 섬에서 섬으로 결국 온 대양을 정복한 일을 떠올리며 한번 전율을 느껴 보시길!
+ 남도 어족은 문법적으로도 무지 흥미롭다.
혹시 '남도 정렬(Austronesian alignment)'에 대해 잘 모르는 언어 덕후나 언어학도에게는 아래 영상을 추천한다.
https://youtu.be/HOk--b_zSvE?si=3Z54ffG--yR-RJEB
필리핀어/타갈로그어를 공부해 봐도 좋겠다.
친구가 같이 필리핀어 공부하재서 언어평등 필리핀어 첫걸음 책을 같이 샀는데 둘 다 안 하고 있다. 듀오링고에 타갈로그어 코스가 생기면 유용하게 참고할 텐데...
주말 저녁에 게으름 피우며 하와이어 듀오링고를 하다가 인도네시아어랑 어원이 같은 단어가 몇 개 눈에 들어오길래 가볍게 나열하고 말 생각으로 쓰기 시작했는데 너무 길어졌다.
아래 내용 출처는 모두 윅셔너리.
하와이어 au '나'
마오리어 au, 말레이·인도네시아어 aku, 타갈로그어 ako.
남도조어 *(i-)aku > ... > 동 말레이·폴리네시아조어 *(i-)aku, > 오세아니아조어 *(i-)au > 중앙태평양조어 *au > 폴리네시아조어 *au.
하와이어 ʻoe '너'
사모아어 ʻoe, 타히티어 ʻoe, 마오리어 koe, 인도네시아어 kau, 타갈로그어 ikaw.
남도조어 *(i-)kaSu > 말레이·폴리네시아조어 *(i-)kahu.
남도의 k가 하와이어 성문 파열음에 대응할 때가 많은가?
그밖에
ia 3인칭단수 인칭대명사 (마오리어, 마인어 같음?),
maika'i 'good' (마오리어 maitai)
++ 말라가시어는 어말 모음을 약화~무성음화~묵음화하듯 발음하는 게 너무 매력적이다.
정확한 조건을 몰랐는데, 영어 위키백과 Malagasy language 문서를 보니 이렇게 설명되어 있다:
"After a stressed syllable, as at the end of most words and in the final two syllables of some, /a, u, i/ are reduced to [ə, ʷ, ʲ]. (/i/ is spelled ⟨y⟩ in such cases, though in monosyllabic words like ny and vy, ⟨y⟩ is pronounced as a full [i].) Final /a/, and sometimes final syllables, are devoiced at the end of an utterance. /e/ and /o/ are never reduced or devoiced."
+++ 구글에 "남동쪽" 하니 101만개 나오고 "동남쪽" 하니 48만개 나오길래 '남동쪽'이라고 씀.
++++ 지구를 반 바퀴 어쩌구 하는 건 이 영상 댓글을 통해 알게 되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IfduN1y-0KY
지금 이럴 때가 아니라 한국어 모의수업 지도안을 써야 하는데... 어떻게 하는 건지... 으으어 마음만 급하다
+++++ 재미있는 글 추천
https://blog.naver.com/mythread/223963363207
+6
‘인도유럽어족’이 엄청나게 방대하고 다양성이 큰 어족이라, ‘게르만’, ‘슬라브’, ‘인도아리안’, ‘이란’ 등 각각의 어파/어군이 홀로 인도유럽어족 전체를 대표할 수 없듯이,
‘남도어족’ 또한 매우 방대하고(세계에서 두 번째로 언어 개수가 많은 어족이라고 한다) 다양성이 큰 어족이다.
그런 맥락에서, 디즈니 영화 ‘모아나’가 그린 것은 태평양 동부의 폴리네시아 문화권일 뿐 남도어족 언어권 전체가 아니라는 점을 밝혀 둘 필요가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