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이 모여 모여>를 읽다
세 줄 요약
1. 손끝으로 점자를 읽어 보았다.
2. 눈으로 보는 거랑은 느낌이 완전 다르다.
3. <점이 모여 모여>라는 점자그림책을 잠시 손에 넣었으니, 이걸 가지고 틈 나는 대로 연습해 봐야겠다.
시각장애인이 글을 읽고 쓸 때 사용하는 ‘점자’는 ‘수어’와 달리 독립된 언어가 아니라 음성 언어에 종속된 문자 시스템이다.
예를 들어 한국 농인이 사용하는 ‘한국수어’는 한국어하고는 완전히 다른, 독자적인 문법과 어휘를 가진 별개의 언어이지만,
한국 시각장애인이 사용하는 ‘한글 점자’는 그냥 한국어를 우리가 지금 보는 한글이 아닌 다른 문자로 받아적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다만 한글 표기와 완전히 일대일로 대응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그런지, 내가 점자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수어에 비하면 훨씬 나중의 일이었다. 수어는 고등학교 때부터 사전을 찾아서 간단한 어휘를 익혀 보는 등 조금씩 접할 일이 있었는데, 점자에 대해서는 가장 간단한 자모표를 제대로 들여다 본 것조차 얼마 안 되었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점자가 수어보다 재미없는(?) 것은 아니다. 언어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글 점자만 배워 보더라도 많은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고, 수어가 그렇듯 다른 나라에서 사용하는 점자를 구경해 보면 즐거움이 배가 될 것이다.
참고로 '언올닷컴(링크)'에 실려 있는 연습용 언어학 올림피아드 기출문제 중 난이도 '쉬움' 문항으로 일본 점자 문제(링크)가 하나 있는데, 어렵지 않고 재미도 있다.
(수어와 점자는 주로 장애인이 사용하는 것이니 아주 단순하게 마냥 재미만 생각해서는 다소 시야가 좁은 태도가 될 수 있지만, 그렇다고 비장애인이 순수한 호기심으로 배워 보려는 시도를 굳이 막을 필요도 없을 것이다. 오히려 점자나 수어를 하나의 문자/언어로서 재미있어하는 시선이 어느 정도 보편화되는 게 바람직한 면도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이렇게 말하는 나도 점자 공부의 재미를 안다고 말하기에는 경험도 지식도 거의 아무것도 없는 수준이지만, 오늘 재미있는 경험을 하나 했기에 기록을 남겨 보려고 퇴근길에 후다닥 글을 써 본다.
‘점자 독학용 교재’를 인터넷서점에 검색해 보면 의외로 몇 종류가 나온다. 나도 그 중 하나를 소장하고 있다. 그런데 한 가지 아쉬운 점은, 그런 독학 교재 중에 점자의 모양을 손으로 직접 만져 볼 수 있도록 올록볼록하게 인쇄된 것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다. (혹시 내가 놓친 게 있다면 제보를 부탁한다.)
모르긴 몰라도 점자를 올록볼록 인쇄하는 게 그냥 평평한 종이로 인쇄하는 것보다 훨씬 비쌀 테니 이해는 되지만, 그래도 기왕에 점자를 배우려는 마당인데 모양을 눈으로만 봐야 하고 손으로 만져 볼 수가 없다는 게 참 아쉬운 노릇이었다.
사실 아쉬우니 마니 할 것 없이 그냥 눈으로 점자 모양을 잘 외워 두고 우선은 손이 아닌 눈으로 읽는 '시독(視讀)'에 익숙해진 뒤, 나중에 지하철역 안내문 같은 걸 가지고 손끝으로 읽는 연습을 따로 하면 그만이기는 하다.
그러나 그런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고 접근하기에는 동기가 좀 약했고, 무엇보다 집 밖에서 점자 읽기 연습을 하기에 나는 집을 너무 좋아한다.
그런 아쉬움(약간 김이 샘)에 게으름이 겹쳐 점자 공부가 흐지부지된 지 얼마나 지났을까,
얼마 전에 문득, ‘교재가 없다면 그냥 점자책을 한 권 사서 그걸로 연습하면 되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검색을 좀 해 봤는데, 보통의 책을 사는 루트로 편하게 구매할 수 있는 점자책은 대개 동화책, 아동용 그림책 종류였다. 재미는 없어 보였지만 어차피 제대로 읽지도 못하는 거, 글자만 익히면 그만이지 내용이 무슨 상관이냐 싶어 그 중 그나마 저렴한 걸로 하나를 조만간 장만해야겠다 마음 먹고 있었다. (역시 가격은 꽤 나간다.)
그런데 오늘 아주 뜻밖의 루트를 통해 한 권을 거저(?) 손에 넣게 되었다.
그런 루트가 있다는 걸 근무 중에 갑자기 알게 되었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일찍 점자로 된 책을 읽어 볼 수 있게 되니 왠지 신이 나서, 점심을 먹고 잠깐 주변에 있는 점자를 아무거나 한번 손으로 읽어 봐야겠다 하고 둘러보았다.
마침 곁에 '아이시스' 생수병이 있었다. 윗부분에 점자가 적혀 있었다. 자주 마시던 물인데, 점자는 잘 의식하지 못했던 것 같다. 이 병을 가지고 생애 처음으로 점자 손읽기에 도전해 보리라는 마음을 먹었다.
호기롭게 도전했지만 아직 낱자 모양이 익숙하지 않아서 '점자세상'에 실려 있는 일람표를 계속 봐 가면서 시도했는데, 그렇게 했는데도 헤맸다.
점자 모양이 실린 일람표를 똑똑히 눈으로 보고 있는데도, 그 모양을 직접 손끝으로 느껴 보려니 지금 만지고 있는 이게 무슨 모양인 건지 곧바로 와닿지가 않았다. 게다가 평평한 면이 아니라 둥글게 굽어진 생수병 위에 적힌 점자이다 보니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한 글자인지 구분하기도 쉽지 않았다.
스스로 읽어서는 엉뚱한 답만 나오기에 결국 검색 찬스를 써 보니, 병에 적힌 점자는 '아이시스'라는 상표명이었다.
전에 유튜버 '원샷한솔'의 영상에서 캔음료 뚜껑에 그냥 '탄산'이라든가 '음료'라고만 적혀 있어서 시각장애인은 마시고 싶은 음료를 마음대로 고를 수가 없다는 이야기를 접한 적이 있다. 그런 이야기를 너무 의식한 나머지 이 생수병에도 '마시는 물'이라든가 '생수' 같은 말이 적혀 있을 줄 알고 그렇게 접근했는데, 롯데칠성음료 관계자들은 오히려 그런 불편을 고려하여 상표명을 제대로 적어 놓은 것이다.
아무튼 그 덕에 'ㅣ', 'ㅅ', 'ㅡ' 점자 모양은 꽤 확실하게 기억에 남았다. 몇 시간 지나니 'ㅏ'는 이제 좀 헷갈린다.
결국 첫 도전에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손끝으로 점자 모양을 느껴 보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알게 되니 오히려 새로운 세계를 경험해 본 듯해 더 신이 났다. 더 도전할 거리가 있나 싶어 이곳저곳을 훑어 보았는데, 아쉽게도 사무실 안에 점자가 찍혀 있는 물건은 오로지 아이시스 생수병 하나 말고는 없었다. 내가 언젠가 만약 시각장애인이 된다면 뭐가 뭔지 알기가 얼마나 어려울 것인가, 새삼 생각해 보게 되었다.
하여튼 이제 드디어 <점이 모여 모여>라는 '점자 그림책'을 읽어 볼 수 있게 되었다.
(사진에 나와 있는 점자는 순서대로 ㅁㅗㅕ ㅅ[ㅓㄴ]ㅣ ㄷ (그리고 ㅚ의 왼쪽 부분) 이다.)
점자가 큼직큼직하게 찍혀 있어서 읽기 연습하기에 좋다. 맨 뒤 페이지에는 그보다 작은 크기 점자로 아주 긴 글이 빼곡하게 적혀 있는데 아직 무슨 내용인지는 잘 모르겠다.
(근데 눈으로 모든 부분을 한 번에 인식하는 게 아니라 손끝의 한정된 면적으로 점자를 읽는 시각장애인 입장에서는 글씨 크기가 너무 크면 오히려 불편할지도 모르겠다.)
내가 빌릴 수 있는 책이 두 권 있었는데, 한 권은 좀 낡았고 한 권은 비교적 새 거였다. 어째선지 새 책은 점자가 뭉툭해져 있는 곳이 많아서 일부러 낡은 걸로 가져왔다.
나무위키를 보니 한글 점자를 '훈맹정음'이라는 이름으로 만들어 발표했던 송암 박두성 선생은 '점자 책은 쌓아 두면 납작해져서 읽을 수가 없으니 꽂아 두라'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시간이 별로 없어서 아직 연습을 많이 하지는 못했지만 일단 좀 둘러보니 재미는 있다. 아동용 그림책이니 이 책에 찍힌 점자만큼은 눈 감고 읽을 수 있도록 해 보자.
+ 손읽기를 처음 시도할 때 자연스럽게 오른손 검지 지문이 동글동글 모이는 지점을 중심으로 해서 만졌는데, 하다 보니 손톱 바로 밑 부위 감각이 더 예민한가 싶기도 하다. 실제로 점자를 읽는 시각장애인은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다.
++ 점자도 수어도 기술 발전에 따라 점차 수요가 적어지고 있다는 모양이다. 유튜버 '원샷한솔'의 영상을 보면, 스마트폰으로 상당히 많은 부분을 커버할 수 있는 듯 보인다.
점자나 수어가 점차 덜 쓰이게 된다 생각하면 '언어덕후'로서는 좀 아쉽기도 한데, 당사자들에게 뭐가 더 좋을지는 당사자들이 알 것이다.
소수언어가 위세 언어에 밀려 사라지는 현상과 원인은 약간 다르지만 현상은 거의 비슷해 보인다. 이쪽도 마찬가지로 언어 덕후로서는 아쉬울 노릇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