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중일기』와 파자시 「折字」
베트남은 한국, 일본과 마찬가지로 한자문화권에 속한다. 지금의 베트남어에는 한국어만큼 한자어가 많다(링크1 링크2). 과거 베트남에서는 각종 공문서를 포함한 다양한 글에 한문을 사용했고, 우리나라의 옛 문인들이 그랬듯이 베트남의 옛 문인들도 한문으로 시를 썼다. 고려, 조선 사람과 베트남 사람이 만나 필담을 주고받은 사례도 많다고 한다.(링크)
베트남의 민족 영웅 호찌민(Hồ Chí Minh 胡志明 호치민, 호찌밍) 주석 또한 한학漢學을 배우며 자라났다. 그의 아버지는 베트남의 과거科舉 시험에 합격한 유학자였고, 외할아버지는 서당 훈장이었으니, 호찌민 주석 또한 어려서부터 한문을 익숙하게 읽고 쓰며 지냈으리라 짐작할 만하다.
이러한 사실은 호찌민 주석이 남긴 저술에서도 잘 드러난다.
호찌민은 중국의 국민당 정권에 붙잡혀 광서 지역에서 감옥살이를 한 적이 있다. 이때 옥중에서 남긴 1년간의 기록이 바로 베트남의 국가보물, 『옥중일기(獄中日記)』이다.
베트남의 민족 영웅이 감옥에서 적은 일기는 표지부터가 이렇게 우리가 빤히 읽을 수 있는 글자로 되어 있다. 이런 걸 보면 베트남하고 우리하고의 어떤 거리가 꽤 가깝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이런 장난을 친 적도 있지만)
‘옥중일기獄中日記’라는 원제는 베트남어 한자음으로 읽으면 ‘Ngục trung nhật ký’가 되지만, 베트남에서는 이렇게 부르기보다 피수식어-수식어 순서의 베트남어 어순을 따르는 ‘Nhật ký trong tù’, 그러니까 한자와 쯔놈으로 적으면 ‘日記 [竜中] 囚’가 되는 명칭이 더 흔하게 쓰이는 모양이다.
- [竜中]은 한 글자다. 쯔놈 글자가 브런치에서 깨져서 이런 표기로 대체한다.
- ‘trong’의 쯔놈 표기는 여럿 있는데 윅셔너리에서 하나를 자의적으로 골랐다.
- 한자+쯔놈(한놈) 표기에 원래 띄어쓰기는 없지만 의미 이해와 한자어 식별을 원활히 하기 위해 단어 단위로 띄어쓰기를 해 보았다.
- 이 기록을 가리키는 Nhật ký trong tù라는 말이 역사적으로 한놈 표기로 적힌 적은 아마 딱히 없겠지만, 베트남어를 모르는 한국인 독자가 친숙하게 느끼도록 한번 써 보았다.
명칭이야 뭐가 됐든, 뭐든 내용이 더 중요한 법이다. 호찌민 주석은 중국의 어느 감옥에서 ‘獄中日記’ 또는 ‘日記[竜中]囚’에 무슨 글을 남겼을까?
이 책은 사실 134수의 한시(漢詩)가 수록되어 있는 시집이다. 호찌민 주석은 감옥에서 1년 동안 한문으로 시를 쓴 것이다.
『옥중일기』에 실린 한시 중 개인적으로 재미있게 생각하는 시가 하나 있어 소개한다. 제목은 ‘chiết tự(折字)’, 즉 한자 모양을 쪼개어 표현한 파자시破字詩이다.
囚人出去或為國,
患過頭時始見忠。
人有憂愁優點大,
籠開竹閂出真龍。
7자*4행 시니까 ‘칠언 절구’? 2행의 끝글자 충忠과 4행의 끝글자 용龍이 압운을 이룬다. 베트남 한자음이나 한국 한자음으로는 운이 서로 달라지지만.
똑똑하신 독자 분들은 위 글만 보아도 바로바로 해석이 되고 파자가 이해되겠지만, 혹 나처럼 한문을 잘 모르는 독자가 있을지 모르니 아래에서 행마다 해설을 달아 보겠다.
번역하면서 『옥중일기』를 한국에 최초로 소개했다고 하는 안경환 교수의 한국어역과 하단 링크의 베트남어역을 참고했으나 안경환 교수의 번역은 행마다 파자 해설과 의역이 다소 자의적으로 선택된 듯하다. 그래서 아래 번역에는 한문을 잘 모르는 나의 뇌피셜 해석이 섞여 있으니 너무 믿지 마시길 바란다.
시 내용을 보면, 프랑스와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아 온 조국 베트남에 대한 호찌민 주석의 애타는 마음과 자신이 감옥에서 나가면 이를 직접 바로잡아 보겠다는 강한 의지가 잘 드러나 있다.
囚人出去或為國,
Tù nhân xuất khứ hoặc vi quốc,
수인출거혹위국,
뜻: ‘갇힌 사람이 나가면 혹 나라를 세우리,’
파자: 가둘 수(囚)에서 사람 인(人) 이 나가고 혹 혹(或)이 (들어가서) 나라 국(國) 자가 됨
患過頭時始見忠。
Hoạn quá đầu thì thuỷ kiến trung;
환과두시시견충.
뜻: ‘어려움이 지나칠 때에야 비로소 충직함이 드러나네.’
파자: 근심 환(患)의 머리 부분(中)이 없으면 비로소 충성 충(忠) 자가 보임
人有憂愁優點大,
Nhân hữu ưu sầu ưu điểm đại,
인유우수우점대,
뜻: ‘사람에게 근심(‘우수’)이 있으면 우수함이 크고,’ (? 베트남어역은 ‘사람이 걱정을 (할 줄?) 알면 장점이 크다’처럼 번역함.)
파자: 사람 인(人) 자에 근심 우(憂) 자가 있으면 넉넉할 우(優)자.
籠開竹閂出真龍。
Lung khai trúc sản, xuất chân long.
농개죽산출진룡.
뜻: ‘농(새장?)에서 대나무 빗장이 열리면 진짜 용이 나오리라.’
파자: 대바구니 롱(籠) 자에서 대죽머리(⺮, 竹)를 빼면 용 룡(龍).
감옥에 갇혀 이런 시를 쓰며 지내던 호찌민은 실제로 석방 후에 일제와 프랑스를 몰아내고 조국 베트남을 독립시키는 데에 성공했다.
그야말로 수인(囚人)이 나와서 위국(為國)한 것이고, 나라에 우환(憂患)이 있을 때에 몸소 그 빼어남[優]과 충성심[忠]을 보인 것이며, 농(籠)에서 빗장[竹閂]이 풀리자 용(龍)이 나온 것이다.
+ 몰랐는데 한국사에서 한국광복군 국내진공작전 이야기할 때 몇 번 들었던 미국 ‘OSS’가 이 시기에 호찌민하고도 연이 있었더라. 20~30년 뒤에 서로 죽고 죽이는 사이가 될 줄 알았을지...ㅋㅋ
++ 아래는 파자시의 베트남어 해석이다. 출처는 아래 링크 참고.
“Người tù ra khỏi ngục, có khi dựng nên đất nước,
Qua cơn hoạn nạn mới rõ người trung;
Người biết lo âu, ưu điểm lớn,
Nhà lao mở then cửa trúc, rồng thật sẽ bay ra.”
파자에 대한 베트남어 해설. 출처는 같다.
“Chiết tự là một hình thức phân tích chữ Hán ra từng bộ phận để thành những chữ mới, có ý nghĩa khác với ý nghĩa ban đầu. Theo lối chiết tự, bài thơ này còn có nghĩa đen như sau: chữ “tù” 囚 bỏ chữ “nhân” 人, cho chữ “hoặc” 或 vào, thành chữ “quốc” 國. Chữ “hoạn” 患 bớt phần trên đi thành chữ “trung” 忠. Thêm bộ “nhân” 人 đứng vào chữ “ưu” 憂 trong “ưu sầu” thành chữ “ưu” 優 trong “ưu điểm”. Chữ “lung” 籠 bỏ bộ “trúc” 竹 thành chữ “long” 龍.”
+++ 『옥중일기』를 국내에 최초로 소개하셨다는 안경환 교수님의 번역으로 나온 책이다. 나는 읽어 본 적이 없지만 참고 삼아 싣는다.
https://search.shopping.naver.com/book/catalog/32485083246
아래는 안경환 교수님이 쓰신 기사문. 파자시도 소개하고 있다.
https://www.localnewsroom.co.kr/news/articleView.html?idxno=671
파자시 해석을 보면 두 행은 파자로만 해석하고 나머지 두 행은 안 그러셨는데 왜인지 모르겠다.
+4 베트남어 위키백과 ‘옥중일기’ 문서 링크
https://vi.wikipedia.org/wiki/Nh%E1%BA%ADt_k%C3%BD_trong_t%C3%B9
- 위에서 지나가듯 『옥중일기』를 ‘베트남의 국가보물’이라고 소개했는데 이건 비유적인 의미가 아니다. 실제로 2012년 10월 1일에 베트남 내각 수상이 『옥중일기』를 국가보물(bảo vật quốc gia寶物國家)로 인정한 바 있다. 위 위키백과 문서에 나오는 내용.
+5 호찌민을 민족 영웅anh hùng dân tộc英雄民族이라 부르는 건 그동안 그냥 오픽 시험 볼 때 내 맘대로 하던 말이었는데, 검색해 보니 실제로 국조 훙왕부터 호찌민 주석까지 역사인물 열네 명을 베트남의 ‘민족 영웅’으로 나열한 명단이 있다.
+6 한문 ‘알못’으로서 한시를 번역하기가 전체적으로 어려웠지만 제2행 患過頭時始見忠 을 해석하기가 특히 까다로웠다. 안 교수님도 파자로만 해석하셔서 도움이 안 됐고... 근데 중국어로 ‘過頭(过头)’라 하면 ‘도가 지나치다’라는 뜻이 있길래 일단 그걸로 번역했다. 호찌민의 원의가 이거였는지는 모르겠지만.
+7 여기 소개한 파자시를 원래 좋아했는데 언제 어디서 처음 본 건지 기억이 안 난다. 제일 오래된 기억은 하노이에 있는, 우리나라로 따지면 서대문형무소 비슷한 곳(?)의 기념품 가게(?)에서인데 내가 파자를 보고 마음에 들어하려면 이해를 해야 되니까 아마 베트남 현지에서 본 게 처음은 아니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