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곰녀 May 19. 2020

신해철과 나

나의 눈부신 시절은 지나갔다 해도

십 대 시절, 신해철을 좋아했다. 1990년대 초중반의 이야기이다. N.ex.t의 ‘인형의 기사’가 포함된 <Home> 앨범부터 ‘불멸에 관하여’가 수록된 <The Return of N.EX.T Part 1>, '힘겨워하는 연인들을 위하여'가 인기를 얻은 <The Return of N.EX.T Part 2>까지, 세 앨범의 음악에 나는 빠져 살았다.

테이프가 늘어나도록(카세트테이프의 시대였다) 듣고 또 들었고, 앨범 전체를 통째로 외웠다. 작은 효과음 하나만 듣고도 그 곡 전체를 떠올릴 수 있었다. 앨범은 감상용과 소장용 두 개를 샀다.

친구들이 내게 어떤 가수를 좋아하느냐고 물으면 사실대로 말하기가 꺼려졌다. 다른 친구들이 N.ex.t를 알게 되고 좋아하게 되는 것이 싫었다. 할 수 있다면 나만이 그의 음악을 소유하고 싶었다.

음악은 신비로운 것이다. 내 마음을 그의 음악만큼 위로해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십 대의 나는 불행했다. 나는 그다지 사랑받지 못한 아이였고, 우리 집은 늘 냉기가 흘렀고 때때로 살얼음판 같았다. 매일 밤마다 집에 들어가기가 싫었다. 자존심이 강했던 나는 어느 친구에게도 나의 불행을 털어놓지 못했다.


밤마다 듣는 그의 음악만이 나의 유일한 해방구였다. 아름다운 그의 음악은 내 상처 받은 마음을 따뜻하게 위로해 주었다. 그것은 당연히 물리적인 것은 아니었겠지만, 음악에서 뻗어 나온 어떤 보이지 않는 손이 내 심장 혹은 영혼을 꺼내어 부드럽게 감싸 그 아름답고 자유로운 기운을 나누어주었다. 비유가 아니라 분명한 작용이었다.

신해철 덕분에 나는 그 시절을 견딜 수 있었다. 그의 음악들은 당시의 내 영혼에 새겨졌다. 서태지가 문화대통령으로 등극했던 시절이었지만(서태지와 아이들도 대단히 좋아했지만) 내가 진심으로 깊이 사랑했으며 그래서 나의 일부가 된 것은 신해철의 음악이었다.

그러나 나는 ‘고스트 스테이션’ 시절의 그부터는 좋아하지 않는다. 라디오는 ‘밤의 디스크쇼’까지, 앨범은 <라젠카>까지만 내게 소중하게 남아있다. 그가 무한궤도 시절 보여준 음악은 청초했고, N.ex.t는 내게 어마어마한 감동을 주었지만 딱 그 시기까지였다. 그 이후의 음악을 찾아 듣기는 했을 텐데 거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고스트 스테이션 시절, '마왕'이라 불리던 그는 내가 느끼기에는 과하게 위악적이었다. 살이 찌면서 예전의 샤프한 느낌도 그에게서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그때쯤부터 내 위대한 뮤지션이었던 그가 더 이상 아름답게 생각되지 않았다. 그가 100분 토론에 나오거나 대통령 후보를 지지하는 tv 광고에 등장했을 때 나는 부끄러워서 채널을 돌렸다.

분명 세상에 좀 더 도움이 되는 일이었다고 생각하지만, 생각과는 별개로 부끄러웠다. 마치 카메라를 잘 받지 못하고 표정마저 어색한 나의 민낯을 카메라로 보는 것 같았다.


생각해보면 예술가에게는 지문처럼 독특하고 고유한 ‘색’이 있는 것 같다. 그것으로 대중에게 한참 사랑을 받은 후, 대중이 그 색의 매혹에서 시들해지면 예술가의 영향력은 줄어들게 되는 것이라고. 사람이 지문을 바꿀 수 없듯이 대중의 입맛에 따라 예술가가 자신의 색을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인기는 거기까지다. 그리고 예술가 또한 자신 안에 있는 색깔을 가장 강렬하게 꺼내놓는 어떤 시기가 지나면 정체기가 오는 것 같다.

왜 위대한 뮤지션들이 전성기를 계속 이어갈 수 없는지에 대한 내 나름의 견해다. 신해철의 NEXT 시절 그는 가장 눈부시게 빛났고, 서태지도 ‘서태지와 아이들’이었던 시절, 이승환도 90년대 초중반에 그랬다. 김현철은 ‘춘천 가는 기차’가 실린 데뷔 앨범이 전 곡이 아름다웠던 최고의 앨범이었다(개인적인 생각입니다).


결국은 내 얘기를 하려고 먼 길을 돌아왔다(신해철에 대한 그리움이 더해져 글이 길어졌다). 나의 전성기는 20대 후반부터 30대 초반까지였다. 내가 한 개인으로 성장해 세상과 대면하여 나를 꺼내놓았던, 가장 눈부셨던 시간 말이다. 나는 중요했고 열심히 일했으며 나의 어떤 장점들은 돋보였다. 

마감하는 기간마다 회사에서 밤을 새우는 일이 잦았는데, 고요한 새벽 텅 빈 모니터 앞에 앉아 있노라면 가끔 믿을 수 없게 행복했다(물론 도망가고 싶었던 날들도 많았습니다만). 그 하얀 여백을 채워가기 위해 집중하고 단어를 고를 때면 나는 사라지고 자유로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 순간에는 가슴 가득 행복감이 차올랐다.


그런 시절을 지나 지금은 대한민국의 흔한 경단녀가 되었다. 앞으로 그때보다 내가 더 일에서 중요해지거나 주목받는 날이 있을까. 다시 어떤 일을 가질 수 있기나 할까. 아마도 힘들 것이다. 이미 너무 오래 일을 쉬었고 다시 구할 수 있는 일이란 별 것이 없다. 일했던 업계에서 나는 잊혀졌고 새로운 업계로 진입하기에 나는 너무 나이가 많다. 나와는 다르게 20대, 30대, 40대를 지나며 자신의 세계에 깊이를 더해가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무척 샘이 났다.

그것이 한 때는 몹시 우울했다. 아직 남은 인생이 긴데 앞으로 더 오를 곳이 없다는 사실이, 완만한 내리막길만 남았다는 것이.

 

나는 30대 중반이 지나서야(10년쯤 시간이 지난 후,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은 뒤) 다시 신해철을 좋아하기 시작했다. 그도 좀 더 푸근해졌고 나는 그가 같이 늙어가는 옛 동지 같았다. 그의 새로운 음악은 여전히 모르는 채였다. 가끔 <배철수의 음악캠프> DJ 배철수 씨가 휴가를 가면 신해철이 특별 DJ로 나와 며칠 진행을 하곤 했다.

그때의 그는 참 정겨웠다. 라디오를 오래 진행해온 사람과 라디오를 오래 들어온 사람, 우리끼리만 아는 이야기를 하면서(딱히 어떤 이야기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유대감 같은 것이다), 능청도 떨면서 오랜 친구처럼 대해주었다.   


나의 가장 눈부신 시절은 아마도 지나가버렸을 것이다. 그 아쉬움에 대해서 꽤 오래 생각해왔는데 어쩐지 근래에는 아무려면 어떤가 싶어 졌다. 내게는 또 다른 시절이 올 것이다. 가장 편안한 시절이라던가, 가장 따뜻한 시절, 가장 지혜로운 시절(운이 좋다면) 같은 것들. 어쩌면 고난의 시절이나 고독한 시절이 올 수도 있겠지.

거기에는 또 다른 무엇인가가 있을 것이다. 나이가 든다는 건 그렇게 다른 시절들을 통과해 나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내리막길이 아니라, 아니 비록 내리막길이더라도 굽이굽이 다른 풍경을 가진 길 말이다. 아마 신해철이 여전히 살아 있었다면 그도 그런 시절들을 살고 있었겠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