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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곰녀 May 25. 2020

랜선 집들이를 좋아하십니까

위화감의 도미노

20대 후반에 잡지사에서 2년 반 동안 일한 적이 있다. 그 때 나는 청담동, 신사동, 논현동 때로는 가회동, 성북동을 누비며 유명 가구 숍들과 멋진 집들을 취재하고 다녔다.

당시에는 어떻게 하면 팀장에게 깨지지 않고 취재와 기사 마감을 무사히 할수 있을까만 생각하느라고, 취재원들의 럭셔리함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지는 못했다. 하지만 가구 숍들의 몇 천만 원짜리 가구와, 몇 백만 원 짜리 조명, 몇 십만 원짜리 그릇에 대해 내심 놀라긴 했다. ‘아니 도대체 누가 이렇게 비싼 걸 산담?’


그 소파와 조명은 최근에 내가 즐겨보는 유투브 채널 속 셀럽A의 집에 놓여 있었다. 이른바 ‘랜선 집들이’ 편을 보다가 발견한 것이었다(십여 년이 흘러도 여전히 사랑받는 디자인의 고전이다).

방마다 콘셉트를 정해 무슨무슨 스타일로 근사하게 꾸며 놓은 크고 멋진 집이었다. 드레스 룸에는 주인의 취향이 담긴 옷과 액세서리들이 색깔 별로 스타일 별로 잘 정리되어 있고, 환하게 빛이 들어오는 넓은 거실에는 푹신하고 큼직하고 세련된, 바로 그 값비싼 소파가 놓여 있었다. 페르시아풍이지만 빈티지하게 바랜 카페트 위에 말이다.


주방은 모던했는데 주방 테이블 위로는 깜짝 놀랄 만큼 비싸고 그만큼 아름다운 팬던트 조명 두 개가 나란히 걸려 있었다. 을지로 조명가게에 가면 이 조명의 카피 제품(‘짝퉁’)도 몇 십만 원에 팔리고 있는, 유명한 디자인의 펜던트 등이었다.

이런 집에는 놀러 오는 사람들도 멋있겠지. 자신감 넘치는 세련된 손님들이 와서 와인을 곁들인 ‘디너’를 우아하게 먹고 갈거야. '보통' 사람인 나는 반사적인 열등감을 느낀다. 그렇게 자신의 집을 카메라로 훑으며 소개하는 셀럽A 또한 외모부터 패션 감각, 말솜씨, 직업까지 멋지고 쿨하다. 영어도 잘한다.

취미로 모은다는 예쁜 액세서리, 분명 싸구려는 아닌 정교한 장난감, 세계 각국의 와인들이 서랍마다 수납장마다 그득그득한 그 집은, 맥시멀리즘 최대치의 집이었다.


최근 몇 년간 미니멀리즘을 쫓고 있던 나의 신념(?)은 갑자기 초라해졌다. 지구에 대한 나 혼자만의 걱정, 어설픈 실천 따위가 뭐 얼마나 소용이 있단 말인가. 풍요로운 물질의 세례에 정신을 잃고만 나는, ‘사람이 태어나서 한번쯤은 이렇게 아름다운 것들을 실컷 누리면서 살아봐야 하는 것 아닌가’ 하고 스스로에게 반문하고 있었다.  


아름다운 남의 집을 구경하는 일은 즐거웠지만 한편으로 위화감이 느껴졌다.

우선, 셀럽A의 의외의 알뜰함이 그랬다. 이 럭셔리한 집의 주인, 셀럽A도 집의 전기세를 걱정하고 있었다. 또 인건비를 아끼려고 셀프로 페인트칠을 한 곳도 있다고 소개했다.


왜? 당신이? 이런 집에 살면서?

전기세는 나 같은 평범한 사람이나 걱정하고, 셀프 인테리어는 돈 없고 간 작은 자의 궁상이어야 하지 않는가.

부자라고 알뜰하지 말라는 법은 없지만, 어쩐지 전혀 공감이 가지 않았다. 그것은 그의 진심이었겠지만, 듣는 사람에 따라 엄살이나 위선으로 느껴질 수도 있는 말이었다.  

      

두 번째 위화감은 셀럽 A의 집에 감도는 공기였다. 풍족하고 세련된 삶이 세계의 전부인 것 같은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공기. 그 세계 바깥에 존재하는 피곤하고 그저그런 많은 사람들의 일상과는 1%의 관련도 없어 보이는 완벽함. 불행이나 가난의 그림자라고는 단 한 방울도 없는 집.


이런 생각은 오버다. 괜한 심술이다. 그 분들은 좋은 분들일 것이다. 찾아보니 기부도 하신다. 그 나름의 직업적 애환과 고충, 가족 안에서의 걱정도 있을지 모른다. 그냥 그 동영상만 놓고 봤을 때 그런 느낌이 들었다. 편집된 삶이 주는 느낌 말이다.       


이렇게 툴툴 대는 나도 누군가에게는 위화감의 대상이다. 우리 아파트 단지의 맞은편에는 회사들이 많다. 맛집들도 많아서, 언젠가 그쪽에서 빵을 사고 길을 건너려 건널목에서 기다릴 때였다. 회사 ID 카드를 목에 건 일군의 젊은이들이 우리 아파트 단지를 보며 말했다.

“저 아파트가 육칠억 한다면서요?”

“와~ 더럽게 비싸네. 도대체 몇 십 년을 일해야 그 돈을 모으는 거야?”

“못 모을걸요. 저기 사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일까요?”


기시감에 웃음이 났다. 20대의 내가 했던 말들을 그들이 똑같이 하고 있었다. 나에게도 서울의 아파트 값은 도무지 도달 불가능해 보였던 까마득한 고지였다.

어느 새 나는 운 좋게도 그 아파트를 소유한 40대가 되어 있었다(물론 은행 대출과 함께). 위화감의 도미노.      


나도 자본과 배포가 허락한다면, 언젠가 셀럽 A처럼 근사한 집을 짓고 아름다운 가구와 좋아하는 물건들로 그득그득 채운 채 한번 살아보고 싶다. 물질이 주는, 손에 잡히는 분명한 행복을 누리면서.

그만한 자본을 갖추기도, 큰돈을 척척 쓸 수 있는 배포를 키우기도 요원한 일이지만, 혹시나 만약에 그 꿈을 이룬다 해도 겸손해야 할 것이다. 나의 윤택하고 우아한 삶은 세상의 다른 존재들에게 조금씩 빚지고 있는 것이므로(물론 그것은 큰 집이 없는 지금에도 마찬가지이다, 빚진 양에는 차이가 있겠지만).

 내게 운이 오느라 대신 불운할 어떤 사람들에게, 또 내 집의 가구가 되느라 쓰러진 인도네시아의 굵고 커다란 나무와, 결국에는 궁지에 몰린 북극곰과 고래에게까지도.


셀럽 A와, 나와, 20대의 회사원들과, 고래와 북극곰이 다 함께 행복할 수 있는 세상. 그런 세상이 오기는 몹시 힘들겠지만, 그럼에도 노력은 해야 한다. 노력해야 그나마 고통의 간극이 좁아지고, 세상에 희망이 있다고 믿어볼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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