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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곰녀 Jun 01. 2020

오렌지를 먹는 행복

요즘 오렌지가 참 맛있다. 잔뜩 사다가 냉장고에 채워놓고 밥 먹은 후에 한두 개씩 꺼내 후식으로 먹는다. 오렌지의 앞 꼭지와 뒤 엉덩이를 칼로 두껍게 잘라 내고 사방을 돌아가며 슥슥 껍질을 벗긴다. 한입 크기로 적당히 잘라 그릇에 가득 담고 가족들과 시시한 이야기를 나누거나 멍하니 TV를 보면서 하나씩 먹는다. 달콤하고 탱글하고 즙도 풍부하다.

맛있게 밥을 먹고 이렇게 오렌지까지 실컷 잘라먹으면 어쩐지 행복한 기분이 든다. 입안에 상큼하고 달콤한 오렌지즙이 가득 퍼지고 행복은 오렌지 과육만큼이나 생생하게 느껴진다. 밥 배불리 먹고 제철 과일 실컷 먹는 것으로 충분한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      

물론 늘 이렇게 편안한 마음인 것은 아니다. 그렇지 않을 때가 더 많고, 아주 사소한 이유로 불행해지는 날들도 있다. 말하기도 구차스러운 사소한 이유들로 한없이 불행해지고 만다. 질투, 외로움, 남과의 비교, 남편의 시큰둥함, 내 아이의 소심함, 잘못한 쇼핑, 실패한 머리 등등.

그런 날은 괴로움 속으로 굴을 파고 들어가 스스로를 미워한다. 나는 왜 이렇게 초라할까, 왜 이것밖에 안 될까, 어느 부분이 잘못되었을까…. 강박적일 만큼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며 습관처럼 좌절한다. 


행복이란 뭘까. 행복은 어디에 있을까.

십 대, 이십 대, 삼십 대, 사십 대까지 나는 계속 행복은 어디에 있는지 찾고 있었다. 내게는 계속 그것이 없었기(또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마흔이 넘는 나이가 되어 최종적으로 포착한 행복의 좌표는 이렇다. 행복은 핵심적인 몇 가지 삶의 요소가 조화를 이루는 데에 있다는 것. 건강, 돈, 일, 인간관계, 휴식 같은 것들 말이다.   

건강이 가장 기본 조건이 되고, 돈이 일정 수준 이상의 물질적 토대를 만들어준 후에, 보람 있는 일을 하고, 사랑하는 가족·친구와 교류하며, 적당한 휴식까지 누릴 수 있을 때 진정 행복에 가까울 수 있다고, 많은 연구 결과와 지혜롭다 하는 여러 사람들이 이야기하고 있었다.

수긍이 갔고 내 생활을 통해 체험해 본 바도 비슷했다. 그래서 나도 그 좌표에 내 삶이 가까워지도록 노력해왔다.      


30대 중반에 결혼을 하고, 내가 이룬 가족이 생기고 성격이 조금 둥글어지면서, 내 힘껏 노력한 중에 가장 행복의 좌표에 가까울 수 있었다. 바로 지금 말이다.

머리로는 현재의 내 삶에 대체로 만족하지만, 마음으로도 지금이 가장 평온한 시기라고 느끼고 있지만, 진정 행복에 도달한 건지는 잘 모르겠다. 여전히 내 안에 채워지지 않는 어두운 어떤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불안하게 눈을 굴리며 안절부절못하거나, 한숨을 쉬며 울적해하는 날들이 아직도 적지 않다.


내가 찾은 좌표는 정답이 아닐지도 모른다. 좌표가 아니라 다른 것이 필요한 것인지도.

어떤 것들은 행복의 좌표로도 해결되지 않는다. 어린 시절부터의 트라우마, 상처를 극복하지 못한 내면의 아이, 겨우 달래며 살고 있는 공황장애, 인류의 미래에 대한 디스토피아적 전망 같은 것들. 나는 여전히 행복의 비밀을 모른다.......      


지난 주말에는 가족들과 자전거를 탔다. 아이는 아이의 자전거를, 남편과 나는 따릉이를 빌려서 한강변까지 나갔다가 다시 근처 공원을 둘러 돌아오는 코스였다.

5월의 봄바람이 우리의 머리칼을 사방으로 휘날리며 변덕스럽게 불었지만 하늘은 미세먼지 없이 맑았고 사람은 적었다. 높게 뻗은 나뭇가지에 신록이 눈부셨고 아카시아 향이 곳곳에 묻어났다. 공원 내리막길을 내려올 때는 하늘이 연한 핑크빛으로 발그레하게 물들 무렵이었다. 여덟 살 아들이 말했다.

“엄마! 저기 산이 진짜 멋지게 보여!”


아이의 그 말을 듣는 순간, 갑자기 가슴속에 몽글몽글 행복이 피어올랐다. 나도 물론 그 산이 근사하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아이가 말하는 순간 그 근사함이 10배로 커지면서 생생하게 느껴졌다.

아이의 깨끗한 마음으로 본 어떤 감탄, 그것을 엄마인 내게 말해주는 정다움, 아름다운 순간을 아이와 함께 한다는 충만함. 그런 이유들이 아니었을지. 그렇게 섬광처럼 행복의 순간이 찾아오고 사라졌다.       


행복의 비밀을 풀지 못한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행복의 순간을 늘리기 위해 노력하는 것뿐이다. 오렌지를 까먹고 자전거를 타고…. 그러다 사소한 이유로 다시 불행해지고, 쓰러졌다가 다시 일어나고. 그렇게 삶이 계속되겠지.


혹여 행복의 비밀을 알았다 해도 사는 순간순간 내내 행복할 수만은 없지 않을까. 그런 것은 오히려 행복의 비밀 따위에 별 관심이 없는, 그러나 성격 자체가 본래 낙천적인 어떤 사람들에게 그저 일어나는 일일 것이다. 우울함과 시니컬함이 내재된 나는 아닐 것이다.

아주 오래된, 누군가에게서 들은 말이 떠오른다. ‘성격이 곧 운명’이라는.


그러니까 너무 애쓰지도 말고 너무 좌절하지도 말고.

그저 오렌지를 실컷 먹을 수 있음에 감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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