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의 감동은 오리무중

12개의 부재 일곱 번째 - 감동 없음

by 사피엔




탯줄도 떼지 않은 채 버려진 새끼 고양이를, 어린 조카가 주워왔다.

일곱 살짜리 강아지는 눈도 못 뜨고 몸도 못 가누는 그 조그마한 생명을 보자마자, 미친 듯이 헐떡였다.

우리는 혹여 고양이가 다칠까 겁을 먹고 떼어놓으려 했지만—녀석이 아기 고양이를 애틋하게 핥고 있는 걸 보고 모두 말문이 막혔다.



자기 젖도 없고, 자기 새끼도 아닌데, 그 조그만 울음소리에 귀를 쫑긋 세우고 혀를 내미는, 종을 뛰어넘는 본능. 심지어, 수컷이었다. 우리 강아지는.



그건 인간이 하는 계산된 공감보다 더 원초적인, 느낌에 반응한 행동이었고—더 순수한 감동이었다.

따뜻한 언어 없이도 전해지는 감동이 있다면, 아마 그런 장면일 것이다.





그에 비해, 미국의 한 항공사 홍보물은 역대 최악의 광고로 꼽힌 적이 있다.

포스터 속 승무원들은 어깨 각도, 손끝의 위치, 표정 근육까지 완벽하게 조율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말했다. "눈이 웃고 있지 않다."

“감동이 없다.”



훈련된 친절은 매끄러웠지만, 감정을 동반하지 않는 표정은 공포보다 더 공허했다.

그 ‘공손한 조형물’ 같은 이미지가 누군가에겐 친절이 아니라, 무감각한 시스템으로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진심 없는 친절은, 아무것도 아닌 것보다 더 차갑다.



식당을 찾거나 백화점에 가도, 표정은 친절하지만 마음이 비어 있는 인사를 우리는 금세 알아차린다. 진심을 알아보는 예민한 관찰자들은 그 얄팍한 웃음 뒤에 감춰진 무표정을 놓치지 않고 감지한다. 그리고 그 순간, 즉각적인 불편함과 묘한 불쾌감을 느낀다.



감동이 없는 사회는 냉소와 무표정으로 유지되는 질서와 같다. 물론 감동 없는 삶을 살아도 결핍 없이 삶을 충분히 누리는 사람은 많다.






감정이라는 건, 그렇게 불쑥 다가와 이유도 없이 다정할 수도 있다는 걸, 강아지를 통해 확신했다.

그리고 동시에, 나는 그런 감정을 얼마나 조심스럽게 봉인해 왔는지를 떠올렸다.



- 그날의 감동은 오리무중, 혹은, 감정을 봉인한 사람의 기록.



감동을 연출하다 결국, 망해버린 항공사처럼 나 역시 감동을 지우기 위해 삶의 건조하고 삭막한 현실 쪽을 택해온 사람이다. 혼자가 익숙하고, 간절하게 부르짖는 사랑은 정작, 불편하기만 한.



5년 전 잠깐 스친 남자가 있다. 그에게서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문자가 도착한다. 나는 그 순간, 잠시 열리는 우주의 문 앞에서 눈부신 찰나를 맞이한다. 허공을 채우는 그의 얼굴, 그와 함께 맞았던 계절, 술잔 부딪히는 소리, 나를 살게 했던 모든 숨결과 설렘들. 하지만 조용히 다시 봉인한다.



그 잠깐의 시절, 나는 한 번도 살아본 적 없는 가슴 뛰는 나날을 맞았지만, 감동이 존재했던 하늘과 기뻤던 새벽을 지우고, 다시 익숙한 고요 속으로 돌아왔다. 설렘보다 안정을, 요동보다 무심을. 사랑이 아니라, 나를 지켜내는 자리로.



하지만 감정을 버리고 얻은 평온은, 아프다. 이 자리엔 늘 바람이 분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통증이 깃든다. 차갑고, 몹시 시리다.



감동이 특별한 것이 아님에도, 이름 붙일 수 없는 어떤 감동은, 아무도 모르게 안갯속에 갇힌다. 감정이 너무 큰 사람은, 때로 현실과의 균형을 위해 "없던 척"을 한다. 그래서 오늘도, 내 감정은 안갯속에 잠긴 채다. 오리무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