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은, 존재의 최소 증명서
빈둥거림의 끝은 항상 맥주다.
아무 성취도, 생산도, 남길 만한 사건도 없는 무료한 하루 끝에서 그래도 살아있다는 감각을 느끼며, 비를 뚫고 맥주를 사왔다.
학원 수업이 줄자마자 아들이 내 차를 쓰기 시작했고, 본격적으로 집순이 모드에 들어간 나는 어쩌다 마트 갈 일도 못 가는 신세가 되었다. 녀석이 어찌나 빨빨거리고 돌아다니는지 한 달에 두 번 주유하던 무기력한 내 차가 일주일 내내 기름 장착하고 매연 뿜으며 달릴 걸 생각하면,
그래, 두 다리 멀쩡한 내가 수박도 사 나르고, 땀도 좀 흘리며 버스 타지 뭐, 한다. 아들 입대 두 달 전.
그렇게 나는 오늘도 하루치의 무기력을, 무료함의 극한에 이른 사람인 양 캔맥주 하나로 봉인하며 버티는 중이다. 누군가에겐 아무것도 아닌 하루였겠지만, 나에겐 여러 이유로 ‘살아낸 하루’.
- 살았다는 증거가 필요한 걸까?
오늘이 어제와 다르지 않았다면, 나는 오늘을 잃은 것이다. 그걸 붙잡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기록이고,
맥주 한 캔은 그 기록의 서명처럼 느껴진다. 텅 빈 하루를 ‘극단’이라 부르면 비로소 거기엔 내가 있었다는 흔적이 남는다.
“이 하루를 견뎠다”고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 나는, 의미 없음을 의미 있게 만들고 싶은 걸까?
빈둥거림은 종종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치부된다.
하지만 말의 힘은, 의미 없음을 해석 가능한 상태로 바꾼다. 맥주 한 캔. 그 짧은 찰나의 감각을 붙잡아 문장으로 적는 순간 무료는 단어가 되고, 단어는 기억이 되며, 기억은 의미가 된다.
나는 반 백수였던 오늘을, 의미 있게 퇴근시키고 싶다.
- 부끄러움을 선취하고 싶은 건가?
하루 종일 아무것도 하지 못한 자괴감. 그걸 남이 보기 전에 먼저 말해버리고 싶은 걸지도.
“무료의 극단까지 갔다”고 내가 먼저 고백하면 게으름도 태만도 더는 누군가의 판단에 맡겨지지 않는다. 그건 내 몫의 언어가 된다. 이건 스스로를 지키는 방식의, 비겁하지 않은 회피다.
- 어차피 살아가는 게 다 견딤이니까?
거대한 사건이 없어도, 드라마틱한 감정이 없어도 하루는 매일 우리의 어깨를 누른다. 그리고 그 하루를 견딘 나에게 누군가는 말해줬음 좋겠다. 잘 버텼다고. 그 누군가가 없기에 나는 나를 위해 쓴다. 이 맥주는 항복의 상징이 아니라, 존재의 최소 증명서다.
그리고 이렇게 또 하루는 작은 거품 속으로 사라진다. 탄산도 알콜도 날아가고, 나는 조금 더 쓴맛을 배운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이렇게라도 남겨두지 않으면 나란 사람도,
이 하루도
도저히......
나만이 아무도 모르게 늙어가고 사라지는 것만 같아서.
— 오늘의 생존자 사피엔, 밥에 맥주를 말아 먹으며.
몇 줄 타이핑 하는 동안 캔맥 2개 흡입. 곧 있으면 나의 페르소나 37번 아저씨가 등장할 예정이다. 3캔째부터 인격 교체, 4캔쯤 가면 연락처 목록에 있는 인간들에게 "지겹다"고 메시지를 뿌릴 것이다. 그 아저씨 덕에 내 연락처는 이제 몇 개 남지도 않았다. 나는 자꾸만.... 소멸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