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라고 불리우는 건, 당사자에게나 또는 그 이름을 부르는 사람에게나 불쾌한 인상을 줄 것이다. 나이가 일정 이상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에 자리를 잡지 못해 방황하며 자신의 젊음을 소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혹자는 이런 백수를 쫓아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하며 긍정적인 시선보다는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눈초리를 보낸다. 현대에 이르러서 백수가 많아졌다고 생각하겠지만 백수는 어느 시대나 늘 있어왔다. 고등 교육을 받았음에도 사회에 적응하지 못해 일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은 조선시대에도 있었고, 고려시대에도 있었다. 다만 현대에 와서 그들이 사회적인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되어 사람들에게 많은 관심의 대상으로 바뀐 것뿐이다.
백수를 떠올리면 머릿속에서 대부분 느껴지는 감상은 게으름과 태만일 것이다. 늦은 시각에 일어나서 늦은 밥을 먹고, 부모님이 퇴근할 때까지 컴퓨터 게임을 하거나 티비 시청을 하며 시간을 때우는 그런 사람들을 떠올리기 쉽다. 부모님은 자식들을 위해 일터에서 힘들게 일하고 돌아오는 반면에, 다 큰 성인이 된 자식은 정작 일을 하지 않고 늙은 부모에게 의존하는 것이다. 그 결과, 가족 간의 대화는 점점 적어지고 백수라고 불리는 젊은이들은 갈 곳을 잃게 되어 더욱 위축되고 만다. 악순환이 계속해서 발생하는 것이다.
우리는 백수들을 보면 우선 부정적인 어조로 말한다. 열심히 하지 않으려는 사람들, 또는 자신의 직무를 유기한 사람들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백수들의 삶을 자세히 관찰해보면, 대부분의 백수들은 그들만의 삶에서 나름의 희망의 끈을 찾고자 노력한다. 구직을 위해 취업 사이트를 왔다갔다하며 자기소개서를 쓰는 사람도 있고, 아르바이트를 하며 하루하루 입에 풀칠하며 돈을 버는 사람도 있다. 제각기 사연은 다르지만 사회라는 현실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 하는 것이다. 다만 정규직이 아니고, 직장이 없다는 이유로 우리는 그들을 깔보곤 한다.
몇몇 사람들은 부모의 잘못된 교육 방식으로 인해 백수들이 양성되었다고 말하곤 한다. 거친 환경에서 살아남게끔 강하게 키우는 것이 아니라, 팔이 안으로 굽듯 자기 자식을 감싸고 돌아 나약하게 키웠다는 이유로 부모들을 비난하곤 한다. 실상은 이와 다른 경우가 많다. 백수들은 대부분 한 번 정도 직업을 가졌던 경우들이 많다. 즉, 정규직 직장의 경력이 있거나 다른 곳에서 오랫동안 아르바이트를 했거나 사회와 접점이 존재했었다.
시간이 지나, 그들은 상처를 받고 사회에서 튕겨져 나와 다시 집 안으로 숨어 들어갔다. 수직 사회에서 행해지는 암묵적인 부조리라던지, 직장 내 괴롭힘과 같은 고통을 극복하지 못하고 자신이 편안함을 느끼고 받아들여진다고 느껴지는 가정 내 보금자리로 도피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를 알지 못한다. 표면적으로 보여지는 현상에만 집착해서, 이들이 게으르고 나태하고 무기력한 사람이라고 일축한다.
눈에 보이는 현상도 겉으로 보여지는 것과 달리, 그 이면을 자세히 살펴보면 실상과 다른 경우가 많다. 그들도 그들 나름대로 생존하고 싶다고, 이 힘든 사회에서 살아남고 싶다고 소리 없는 아우성을 치는 것이다. 오랫동안 장기 백수 기간을 보낸 이들의 마음을 살펴보면 대부분 연약하고 감성이 깊은 경우가 많다. 경직되고 경쟁이 과열된 사회에 적합하지 않아 사회의 구성원들로부터 축출된 그들은 사회에 아무리 적응해보려고 노력해도 쉽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사회는 이들을 쉽게 용납하질 않았다.
만약 누군가가 백수로 지내고 있다면, 우리는 한번쯤 사회의 이면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단지 저 사람이 일을 하기 싫어서 백수로 지내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점 때문에 상처를 받고 회피 하는 것이 아닌지는 생각해보며 말이다. 비난하고 비판적인 어조로 그들을 훈계하지 말고, 최대한 감싸고 보듬어 주는 방식으로 접근해야 한다. 다양한 심리 상담과, 동년배의 청년들이 모여 산다는 ‘두더지 집’과 같은 시스템을 정부 차원에서 설계하여 이들에 대한 문제를 조속히 해결해야 할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겪지 않는 일이면 쉽게 공감해주질 않는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과 다르면 비난하고 훈수를 두는 경향이 있다. 세상에 마음이 약하고 자리를 잡지 못하는 사람들은 늘 존재해왔다. 청년 백수들도 분명 그들만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사회가 따뜻하게 그들을 맞아주어야만 그들도 덩달아 마음을 활짝 열어 젖힐 것이다. 관대한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 주변에 어려움에 처한 구성원들에게 관대한 자세로 그들의 어려움을 들어 주어야 한다. 더불어 사는 사회에서 개개인의 행복은 그들의 총합인 사회의 행복으로 직결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