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당신이 길을 가다가 호랑이를 마주쳤다고 가정해보자. 살기 위해 도망칠 것인가, 아니면 맞서 싸울 것인가? 영화의 한 장면처럼 막대기를 들고 호랑이의 눈을 찌를 수도 있다. 하지만 실패하면 잡아 먹힌다. 도망쳐도 붙잡힐 확률이 높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당신은 아마 죽을 확률이 높다. 하지만 잠자는 척을 한다면 상황이 달라질 수도 있다. 바닥에 누워 잎사귀가 된 것처럼, 고개도 들지 않고 조용히 숨을 쉬며 호랑이의 동태를 살핀다. 호랑이가 궁금해서 앞발로 나를 건드린다면 그냥 그대로 냅둔다. 갈 때까지, 내게서 멀어질 때까지 가만히 있다가 어슬렁어슬렁 사라지면 그제서야 일어나 냅다 도망가면 된다. 단, 줄행랑을 칠 때도 주변에 호랑이가 나를 보고 있나 경계는 하면서 말이다.
사람은 두려움에 휩싸이면 이성이 감정을 통제하질 못한다. 먼 미래에 대한 불안감과 막연한 기대감 때문에 그런지, 당장 해야 할 일에도 집중하지 못하게 된다. 어떤 사람은 정신 집중과 고도의 수련을 통해 극복할 수 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극한 상황에 몰리게 될 경우, 뇌에서 일어나는 순간적인 충동으로 인해 적절하게 반응을 취하기가 어렵다. 앞서 언급한 호랑이를 마주했을 때의 예시처럼, 순간적인 판단력을 동원해 대처하기보다는 내부에서 솟아오르는 거대한 두려움이라는 감정에 지배당하게 될 것이다.
감정과 생각을 통제하는 건 비교적 어려운 일이다. 머리에 떠다니는 생각이란 녀석들을 붙잡고 싶어도, 바람처럼 이리저리 왔다갔다하며 머릿속을 헤집고 다닌다. 감정이 이성을 통제하고, 감정의 쓰나미에 뇌가 휩쓸린다면 인간은 이성적 대처를 취할 수가 없게 된다. 의도적으로라도 이성을 동원해 순간적인 어려움과 충동에 맞서 위험한 상황을 대비할 수 있는 조치를 취해 놓아야 한다.
네덜란드의 철학자 스피노자는 이를 ‘명석판명한 관념’이라고 설명한다. 우리가 느끼는 감정의 실체를 제대로 알고, 이해하고 파악한다면 그건 더이상 우리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는 납덩이 같은 감정이 아니게 된다는 말이다. 쉽게 말해,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란 말도 있듯이 감정에 깊게 다가가 그 근원을 알아낸다면 우리는 강력한 적에 맞대응하는 법을 터득할 수 있게 된다. 내 안에 생긴 감정을 이해하고, 그에 맞게 대처할 확률이 높아진다. 이는 정서라는 개념으로도 설명할 수 있는데, 어떠한 감정을 그것보다 더 강한 감정으로 대체하거나 극복한다면 이해와 통찰이 더해질 수 있다는 뜻이다.
감정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말해주지만, 외부의 자극에 따른 신체의 반응으로 그럴싸하게 해석할 수 있다. 외부에서 어떤 자극이 툭하고 들어온다면, 어떤 반응이냐에 따라 우리의 생각과 감정이 결정된다. 생각해보라, 사람마다 제각기 슬픈 상황을 마주했을 때 대처하는 반응이 모두 다르다. 누군가는 눈물을 흘릴 수도 있고, 누군가는 묵묵히 슬픔을 억제할 수도 있다. 감정에 대한 이와 같은 다양한 반응이 우리의 행동을 구성한다.
만약 누군가가 자신의 감정을 계속해서 건드린다면, 당황하지 말고 그 감정을 파악하려고 노력해보자. 무조건적으로 반응하지 말고, 계획적이고 통제 가능한 반응을 떠올려, 보다 객관적인 자세를 유지하는 것이다. 만약 이것이 성공한다면, 우리는 일상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에 대하여 의외로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게 된다. 운전을 하다가 길을 비켜주지 않는 차량을 만날 때나, 내 뒤에 있는 사람이 새치기를 할 때처럼 일상에서 종종 마주칠 수 있는 상황에서, 전두엽을 따라 움직이는 대뇌의 통제가 우릴 보다 편안한 길로 인내해줄 것이다.
때론 적절하게 화도 내야하고 슬픔에 눈물을 흘릴 때도 있어야 한다. 무조건 감정과 생각을 통제하고 억제한다면 정신과 몸에 해롭기 때문이다. 다만 감정이 극한까지 올라와서 일상생활에 문제가 생긴다면, 그럴 때를 대비해 연습을 조금씩 해보는 습관을 길러보자. 감정을 파고 들어가 순간적으로 내 눈앞에 놓인 상황을 직시하게 된다면, 처음이 어렵지 여러 번의 연습을 통해 무분별한 감정의 늪에서 헤어나올 수 있게 될 것이다. 호랑이가 당신을 잡아먹길 바라는가? 아니면 유유히 그 상황에서 안전하게 빠져나오길 원하는가? 선택은 당신에게 달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