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래도 ‘사람 사는게 다 같을거야’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주변에서 각자가 태어난 환경마다 삶이 극단적으로 달리 펼쳐지는 모습에 쉽게 넋을 잃을 수도 있다. 금수저와 흙수저. 누군가는 아버지의 유산을 물려받아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맘껏 진행하며, 자기가 배우고 싶은 학문에 대한 깊은 교양을 쌓아 나갈 수도 있다. 하지만 흙수저라 불리는 누군가는 어렸을 때부터 과도한 신체 노동과 가난한 환경 때문에 공부에 ‘공’자도 접하지 못한 채로, 불우하게 커나갔을 확률이 높다. 둘은 같은 시대를 살고 있고, 나이도 같고, 성별도 같지만 삶이 완전히 다르게 펼쳐진다. 이것은 조선 시대에도, 로마 시대에도, 세계사 전반적으로 펼쳐지는 모든 범위를 보더라도 마주하게 되는 공통적인 현상일 것이다.
누군가는 부러워할 수도 있다. 금수저를 부러워하고, 나는 왜 흙수저로 태어났을까라며 자책하고 자신의 삶을 후회로 보낼 수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금수저는 금수저 나름대로 고통과 고민이 있고, 그들도 삶에 있어서 순도 100%에 가까운 완전한 행복을 물려받는 점은 아니라는 것이다.
재산이 많고, 사업을 영위해 가문의 부를 후손들에게 넘겨주는 사람들은 가업의 운영에 있어서 꽤 고달픈 시련을 겪을 수도 있다. 타고난 미모를 갖고 남성들에게 인기를 구가하는 여성은 자신의 외모에 대해 불평불만이 존재할 수 있고, 소위 말하는 ‘똥파리’들이 꼬일 수도 있다. 그만큼 사람의 인생은 가까이에서 들여다보기까지는 자세히 알 수 없는 법이다. 우리가 늘 동경하고 존경했던 사람들의 인생을 현미경을 끼고 들여다본다면, 아름다우리라 생각했던 상상들이 어떤 점에서는 산산이 부서지고, 굉장히 굴곡지며 어딘가 뾰족하게 솟아 쉽게 고치기가 힘들 수도 있다는 점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후회와 자책을 하는 사람들은 아마 자신의 현재 상태에 만족을 느끼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그러므로 자신이 가진 부에 대해 남들과 비교를 하거나, 외모가 추하다며 본인의 상태를 평가절하할 가능성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노여워할 필요도 없고, 슬퍼할 필요도 없다. 우리는 우리 각자로서, 우리가 존재한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모두 존중받을 필요가 있고 가치 있는 존재들이다.
비록 사회가 사람들에게 기준을 강요하고 의무를 부과하더라도, 그것에 너무 연연하지 말고 자신의 현생을 잘 살아나가다 보면, 꼭 사회라는 그 테두리 안에서만 내 ‘존재가치’가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사람들과 조화롭게 지내는 것은 중요하겠지만, 자신의 본질이 침해되면서까지, 다시 말해 자기 자신의 ‘본질적인 기준’을 놓으면서까지 사회에 모든 것을 헌납하는 행위는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사회가 구성되기 이전에 하나의 소중한 개체에 해당한다. 군락을 이루는 개미들도 개미 하나하나가 없다면, 그 공동체는 유지될 수가 없다. 꿀벌을 만드는 벌들의 공동체도 마찬가지다. 하물며 인간은 어떠한가.
그러니 너무 원망하지 말고, 너무 슬퍼하지도 말자. 우리의 삶이 단 한번뿐이라고 가정한다면 지금 느끼는 삶이 팍팍하고 답답하게 느껴지겠지만, 세상을 넓게 파악하고 받아들이는 습관을 기르다 보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종교에서 말하는 윤회나 사후세계를 믿을 수도 있고, 심리적 위안을 줄 수 있는 다양한 전통들이나 철학에 관심을 가져보면, 이들이 심리적인 완충으로 작용해 고난이 닥치더라도 언제든 되튀어오를 수 있게 된다. 우리의 삶 속에서도 분명 빛나는 부분이 존재하고, 때로는 어둡지만 그 터널을 잘 지나가기만 한다면 환희의 불꽃이 솟아오르는 지점에 도달할 수도 있다. 자기 자신을 믿어보자. 나는 ‘나’이기 때문에 존재할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