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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이언 Jun 28. 2020

퇴직 후 이모저모 - 6

퇴직? 하지 마라.

(현재든 노후든 걱정하지 않아도 될 만큼 경제적 자유를 획득한 사람,

의사 면허 같은 자격증이 있어 평생 일할 수 있는 사람,

불굴의 의지를 지닌 초긍정적인 사람...도 아닙니다.

처한 상황이나 세상을 보는 시각이 여유롭지 못해 이전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힘들어할 사람이고

그럼에도 이대로 삐리리 하게 삶을 마감하고 싶지 않아서 늘 고민만 하는,

그리고 그게 어찌 온전히 내 탓만이냐며 다른 것에 핑계를 대고 싶은 사람입니다.)


명퇴를 선택하고 30년의 직장 생활을 마감한 지 1년 반이 지나간다.

1년 반 동안 여기저기 이력서를 올리고 연락이 오면 면담을 하고 편의점 알바도 하는 등 여러 가지를 시도하고 경험했다.

시간이 점점 흐르면 무기력해질까 봐 급한 마음에 팔딱거리며 다녔다.

그렇게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다몸뚱이 이상으로 정신은 복잡했다.


후회... 반성...

스스로 선택한 결정이었지만 미래에 대한 불안감에 가슴은 쪼그라들었고 그 선택을 핑계로 삼았다.

"그때 ~를 하지 않았으면..."이라는 생각이 들며 후회했다.

(하지만 그때로 돌아가도 지금의 이 기억을 가지고 가지 않으면 결국 같은 결정을 한다는데 한 표)


시간이 흐르며 후회는 대상과 이유가 달라졌다.

처음엔 명퇴로 인해 잃는 것들을 후회했다. 그것을 잃고 난 뒤에야 그 가치가 어떤지 알았다.

지나고 보니 명퇴 보상금은 퇴직을 넘어설 만한 가치를 지니지 못했다.

(단순 계산으로도 재직하는 동안의 수령 총액보다 적었고 다른 일을 찾는다 해도 일의 질이나 강도 또한 기존 업무가 편했다. - 함께 퇴직하고 다른 일자리를 찾은 몇몇은 퇴직하길 잘했다고 했다. 비록 보수는 턱없이 적었지만 스트레스는 없어서 좋다고 했다. 그게 진심인지 방어기제에 의해 스스로 세뇌한 건지는 모를 일이다.)

그렇게 머리와 가슴속에 켜켜이 쌓여만 가던 후회는 더 이상 쌓아 둘 곳이 없을 무렵에야 멈췄다.

드디어 후회의 굴레에서 벗어난 건가?

글쎄다, 삶이 그리 만만할까?

후회라는 녀석은 내게 서서히 내성이 생기는 걸 눈치채고 반성으로 모습을 바꾸어 후회의 사이사이로 스며들었다.

명퇴로 잃은 게 아까워서 명퇴 자체를 후회하는게 아니라 명퇴하고 나서 세상에 나와 보니 명확히 보이는 내 지난 날의 아쉬웠던 행태에 대한 반성으로 바뀌었다.

그렇게 모습을 바꾼 건 마음의 고통을  버거워하는 숙주가 견디지 못해 파멸할까 봐 DNA가 방어기제의 작동을 지시한 것이다.

아쉽게도 나를 위한 건 아니다. DNA의 영속을 위해서다.

괜히 DNA를 들먹이며 투정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후회든 반성이든 그런 것들은 사실 내 의지와 상관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전혀 의도하지 않은 것이다.

그것만이 아니라 시도 때도 없이 떠올라 나를 공격하는 지난날의 기억들도 그러하다.

그것 역시 내가 지시하지 않은 근원을 알 수 없는 작용들이다.

행동이나 생각이 내 안에서 비롯되고 실행(하든 안 하든)되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괴로운 생각과 기억을 내가 원할 리 없으니 내가 모르는 영역에서 일어나는 게 맞다.

생각이 만들어지고 떠오르다가 또 다른 생각으로 가는 건 누구의 지시일까.

외부에서의 지시를 받아 뇌가 작동하든 스스로 움직이게 세팅된 뇌의 알고리즘에 의하든 나는 그런 생각과 기억을 주문한 적이 없다.

나는 개입하지 않고 있으니 대체 내게 자유 의지가 있기나 한지 의문스럽다.

그렇다면 대체 어디까지가 내 것이란 건가?

내 자유 의지로 통제할 수 없는 것도 내 것인가?


그렇다면 나는 온전히 자유로운 존재가 아니다.

스위치는 절대자(절대자가 우리들의 인식 속에 있는 우리를 닮은 형상의 존재인지, 아니면 그냥 세상이 현재와 같은 방식으로 운영되는 메커니즘 자체가 절대자인지 모를 일이다)가 켜고, 나는 그 이후를 비교적 자유롭게 설계하고 실행(그것 역시 온전히 자유롭지는 않지만)하는 어설프게 자유로운 존재가 아닐까?

그러나 문제는 이것이다.

자유로운 존재인 척 착각하고 까불게 날뛰도록 설계된 절대자의 장난감에 불과하더라도, 그래서 주문하지 않은 생각과 기억으로 고통을 겪더라도 그 이후의 것들은 내 몫이라는 거다.

무엇을 위한 고뇌인가?

1년 반이 지나며 후회는 빈도를 줄였다. 식상하기도 했고 투정은 이쯤에서 멈춰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더 이상의 후회는 하지 않더라도 반성만큼은 또렷하게 머리에 새기려 한다.

후회가 주는 고통을 줄이려면 그것이 제대로 역할을 하게 해야 한다.

후회는 그것을 반복하지 않게 해주는 것에 그 가치가 있다.

매번 똑같은 행위로 똑같은 후회가 반복된다면 그건 자학이다.

후회가 가치를 얻고 반성으로 연결되려면 심적 고통을 줄이거나 피하려고 하지 말고 마주 봐야 한다.

힘들고 고통스러워 눈을 돌리고 싶지만 후회의 본질은 무엇이고 후회하는 사건(정확히 말하면 사건 전과 후에 일어난 자신의 생각과 판단 그리고 실행)의 각 과정에서 어떤 정보를 어떻게 해석하고 어떤 기대를 했는지, 그것은 정확한 것이었는지 제대로 준비는 했는지 등을 확인해야 한다.

그래야 덜 반복될 테고, 그제야 후회가 제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명퇴를 선택함으로써 확인하게 된 나 자신에 대한 후회는 무엇이었고 반성은 무엇인가.

명퇴를 경험하지 않았다면 결코 알 수 없었을, 대강 짐작만 하고 가슴 시리게 느끼지 못했을 후회와 반성은 대개 이런 것이다.

   ...왜 그렇게 밖에 못 살았을까...

   ...왜 진작 알지 못했을까...

누적된 후회에서 찾게 된 건 지난날에 대한 반성이었다.

퇴직하고 나서야 보였다.

울타리를 벗어나 온전히 나 혼자가 되었을 때, 그때서야 보였다.

몸에 걸친 것들을 다 벗겨내고 알몸이 되었을 때, 그때서야 내가 누구이고 무엇인지 보였다.

대체 왜 그런 것들은 젊어서는 안 보이고, 울타리 안에서 무언가를 걸쳤을 때는 보지 못 하는 걸까?


물론 명퇴한 모든 이들이 그렇게 느끼는 것은 아니다.

퇴직함으로써 여유로운 삶을 즐길 수 있게 된 이도 있겠고, 새로운 사업을 시작했는데 적성에 딱 맞거나 수입이 훨씬 늘어서 퇴직하길 잘했다는 사람도 있겠다.

설령 그렇지 못하더라도 스스로 처한 상황을 이해하고 수용하는 멘털 갑인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래서 후회와 고통의 시간을 보낸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을 수도 있다.

반면, 부정적이고 비관적인 성향의 나는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그런 대처밖에 할 수 없어서 백약이 무효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사실, 지금에 와서 후회하고 반성하는 건 큰 의미 없다.

그냥 괴로울 뿐이지 되돌아갈 길이 없기 때문이다.

60년 가까운 시간을 후회하고 반성할 거리만 저질러 놓고 이제와 뭘 어쩌겠다는 건가.


아니다. 아무러면 어떤가.

제대로 살아내지 못하면 어떤가.

열심히 살지 못한 거 후회만 하면 어떤가.

앞으로도 같은 패턴을 반복하면 또 어떤가.

여전히 투정과 히스테리를 부리면 또 어떤가.

그러다 말 테고, 조금은 덜해지지 않겠는가.


그러나, 아직 다행(?) 히 직장인이라면 퇴직하지 말자.

직장에서 나름의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면 더더욱 퇴직은 꿈도 꾸지 말자.

거기서도 못했는데 나와서는 뭘 잘할 수 있겠는가.

"혹시 내게 맞는 일이나 대박 사업이?"라는 생각은 접자.

'혹시'는 역시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니 퇴직 후를 생각했을 때 경제적 문제가 걱정된다면, 마땅한 일자리가 걱정된다면,

그리고 그러한 것들이 120% 준비되었거나 확정되지 않았다면...

지금부터 준비하던가, 준비될 때까지 버티는 게 최선이다.


최고의 재테크는 직장 오래 다니는 거다.

………………………………………………
쓰고 나서 다시 읽어 보니 이건 아니다 싶다.

내 후회와 좌절을 굳이 타인에게 말하는 건 어찌 보면 오만이다. 다른 이들은 나와는 다른 본성으로, 나와는 다른 재능으로 같은 일, 같은 처지에서 성공하거나 행복할 수 있다. 그러니 어찌 내가 이러쿵저러쿵 말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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