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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이언 Jun 14. 2020

퇴직 후 이모저모 - 5

구직활동

퇴직하고 나니 주변에선 수고했다며 한동안 마음 편하게 푹 쉬라는 소리들이 많았다.

국내든 해외든 혼자 다녀보라고도 했다.

하지만 정작 난 급한 마음에 발을 동동거렸다.

시간이 지나면 내 뒤에 깔린 후광은 점차 옅어지고 마음은 점점 조급해질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점차 그러리란 건 착각이었다.

배경이나 후광은 점차 옅어지지 않고 퇴직과 동시에 바로 사라졌다.

날 위해 준비해둔 일자리도 없었고, 내 성향과 자금사정에 맞는 사업거리는 어디에도 없었다.

아무도 내게 '어서 옵쇼' 하지 않았다.

사실 조금의 기대가 있었다. 내가 필요하니까 함께 일하자는 제안이 조금은 들어올 줄 알았다.

퇴직 전에도 같이 일하자거나, 무엇을 해도 잘할 거라는 말을 여러 사람들이 했었다.

우습지만 나 스스로도 그리 생각했다.


처음에 한 두 군데에서 연락이 오긴 했다.

어떤 IT 제조업체였다.

영업을 하라고 했다.

늘 영업 쪽에 있었으니 크게 어려울 건 없었다.

아이템도 좋아 보였다.

급여는 실업 급여와 비슷한 금액을 제시했다.

실업급여를 받은 지 1달쯤 될 때였다.(일단 실업급여를 신청하면 도중에 취업할 경우 급여 지급이 중단된다 - 실업 급여 수령 기간이 50% 이상 남으면 잔여 수령액의 50%를 1년 뒤에 주기도 하지만)

실업급여와 같은 액수를 준다고?

고용이 보장되는 대기업과 달리 언제든 나가라고 하면 그나마의 실업급여는 어쩌라고?

일하지 않으면서도 주는 실업급여를 포기하라는 건가?

몇 가지 수정 제안을 했지만 업체 측에서 난색을 표했다.

며칠 고민 후 정중히 거절했다.

정중히 거절했다는 건 나를 몰라봐 준 것에 대한 서운함을 감춘 표현이다.

아울러 혹시나 모를 훗날을 대비해 가늘게라도 관계를 잇고 싶다는 굴복이기도 하다.

그러나 아무리 정중해도 거절한 그 자리엔 거절 그 자체만 남는 법이다.

혹시나 모를 훗날 역시 일어나지 않는 게 현실이고.

지난날 다시 되돌리는 건 내키지 않지만 지금 다시 같은 조건의 제안을 받는다면...?

'당근 OK 해야지. 깨끗한 양복 차려 입고 이발소에도 들렀다 만나러 가야지.'

그 업체가 잘 나가고 있다는 소문 때문만은 아니다.

가진 기술이 없는 '문송(문과 출신이라 죄송합니다)' 출신이라서,

남들 다 할 수 있는 영업직에 있으면서 모난 돌 정 맞는다는 핑계로 남들 하는 만큼만 했고,

퇴사 후의 바깥은 북풍한설 몰아치는 추운 겨울이라는 귀로만 들었던 말을 이제야 진짜 저리게 알아 들었기 때문이다.


그다음엔 지인에게서 네트워크 마케팅을 같이 하자는 제안이 왔다.

돈을 벌 수 있다면, 일을 할 수 있다면 뭔들...

그래서 안내하는 대로 설명회에 나갔다.

깜짝 놀랐다.

엄청난 규모의 홀에 말끔하게 차려입은 수백 명이 운집해 있었다.

여자들이 많았지만 남자들 역시 비슷한 비율이라 더 놀랐고 나이 든 사람들보다 20~30대 젊은 친구들이 많아서 놀랐다.

청년 실업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쉽게 큰돈을 벌 수 있단 믿음(또는 꼬드김) 때문인지 모르겠다.

진행자의 간단한 소개와 함께 강사가 연단으로 올라오는 순간 갑자기 다들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쳤다.

그 강사가 그쪽에서 꽤 높은 직급에 해당되는 사람이었나 보다.

그래도 그렇지 기립박수라니...

계급화된 조직 문화에 체질적으로 거부감을 갖고 있던 나는 잠시 갈등했다.

일어나기는 싫은데, 그러자면 혼자만 앉아 있게 될 때의 주변 시선이 두려웠다.

'그런 사람이 이 자리엔 무엇하러 왔지? 예우도 해주지 않으면서 뭘 듣고자 하는 거지? 그럴 거면 나가던가...'

머뭇거림도 잠시, 바로 일어나 함께 손뼉 쳤다. 젠장...


(관심 사항이 아니겠지만 굳이 개인적 성향을 잠시 노출하자면...)

사실 나는 회사에서나 다른 집단에서나 계급과 관련된 예우나 문화에 거부감이 크다.

내가 누군가에게 행하는 것도 싫고, 남이 내게 그렇게 대우하는 것 역시 불편하다.

어떤 계기가 있어서 생긴 성향은 아니지만 평등(평등이라기보다는 공평에 가깝겠다)은 다른 무엇보다 중요한 기준이다.

나이나 직업, 조직 내의 위계질서에 따른 특별한 혜택이 싫다.

특히, 우리들의 머슴이라고 하면서 정작 우리를 머슴 취급하는 선출직에게 주어지는 특권은 더더욱 싫다. 

직접 민주주의가 불가능한 지금, 필요에 의해 대표로 선출되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가져야 할 권리는 그가 나나 동일한 크기여야 한다.

그렇다고 내가 타인을 오로지 평등하게 대하겠다는, 세상에 평등을 구현하고 지키겠다는 대단한 이념을 가진 것은 물론 아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타인이 내게 지켜야 하는 기준  침해받고 싶지 않은, 침해당해서는 안 되는 기준이다.

그렇다고 로크나 홉스, 마르크스나 엥겔스 주장 영향을 받아서도 아니다.

어쭙잖게 한 두 번 읽은 정도로 그들의 깊이를 이해하고, 감화되어 공평, 평등 어쩌고 주절거릴 수는 없다.

다만 내 생각의 타당성을 뒷받침하기 위해 차용할 뿐이다.

어찌 되었든 나는 의도적이든 무작위이든 당하는 불이익이 싫은 고, 어쩌다 일어나는 약간의 불이익에 지나칠 정도로 분노하고 집착하고 오래 마음에 담아 두었다.

대다수 사람들이 그러려니 하고 넘기는 것도 난 그래서 개돼지 소리 듣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틈나는 대로 주장했다.

오직 내게만...

왜 그런 집착이 만들어졌는지 이제는 알 수 있을 것 같다.

자존감이 낮은 거다.

나는 능력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실제 살아온 과정이나 현재의 모습이 기대에 미치지 않았던 거다.

그렇게 내 가치에 대한 사회의 판단 기준이 나와 달라서 자존감이 낮아진 것이다.

그래서 존경의 기립 박수도 아주 거북했던 것이다.

그런데 자존감 어쩌고 하는 것도 다 헛소리다.

더 솔직해지자면 평등이니 공평이니 자존감이니 뭐니 하는 그 모든 감정은 부러움에서 비롯된 시기와 질투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수백 명의 기립 박수를 받으며 등단한 강사는 어디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보잘것없어 보이는 60 초반의 여성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경험을 생생하게 들려주었다.

어린 삼 남매를 놔두고 병으로 세상을 떠난 남편의 이야기에 이르러선 모두가 눈물을 훔쳤고, 어려운 상황을 견뎌내는 이야기에서는 마음속으로 응원을 보냈다. 네트워크 마케팅(다단계업으로 등록되어 있는)에 따르는 곱지 않은 시선을 견디며 지금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의 과정을 들려줬다.

그렇게 1~2시간 이야기를 들려준 후 누구나 다 자기처럼 될 수 있다는 말과 함께 기립박수를 받고 떠났다.

거기에 있던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개월 후회와 좌절의 시간을 보내며 차갑게 식어 쪼그라든 가슴속이 불길로 빵빵해졌다.

나도 강사처럼 수백의 사람들에게 성공담을 들려줄 그 언젠가를 상상했다.

그랬다. 거기에선...

그러나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있던 건물과 하늘변함없는 현실 그대로였고, 살랑거리는 바람몸과 코로 익숙한 여느 때의 바람이었다.

내 주변은 현실의 바다였고 아까동과 불길은 한 방울의 잉크다.

그래. 그게 차라리 편한 현실이었다.


그렇게 현실을 알게 된 후 여러 구직 사이트에 이력서를 올렸다.

이제야 알게 된 내 수준에 맞는 건물관리, 경비, 운전...

그조차 건방진 판단이었다.

사용자에게 나 따위는 필요 없었다.

흔하디 흔한 수만 명 중 눈에 띄지 않는, 눈에 띄면 걸리적거려 치워 버리는 존재였다.

기껏 전화가 오는 곳은 보험 회사뿐이었다.

그러다 혹시 하는 마음으로 아르바이트 자리에 지원해봤다.

같은 아파트 단지 상가에 있는 편의점.

일주일에 이틀, 밤 11시부터 아침 7시까지의 심야 아르바이트.

밤에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는 나로선 안성맞춤인 일이라 생각해서 지원했는데 덜컥 일하러 오란다.

결제 시스템(POS)을 잠시 배우고 바로 시작했다.

죽음이었다.

매년 건강검진을 받으면 8~9군데 이상이 있다고 나오는 내게, 이명과 어지럼증으로 헤매는 환갑을 앞둔 내게 그 일은 극한직업이었다.

새벽 2~3시가 되면 서있기 조차 어려울 정도로 어지럼증이 심해졌다.

침대에 누워서 잠과 씨름하는 것과 환한 전등불 아래서 8시간을 서서 지내는 것은 천양지차였다.

일을 마치고 집에 와서 잠을 청해도 생체시계가 잠드는 시간이 아니라며 수면을 거부했다.

이젠 밤과 낮 모두 잠을 들지 못하는 상태가 된 것이다.

하루 일하면 1~2일은 멍한 정신과 쪼그라드는 육체적 통증에 시달렸다.

그러던 어느 날 누군가 전화로 보험 영업을 권유했다.

이전의 수많은 보험 영업 권유를 단칼에 거절했음에도 유독 그 전화는 친절히 받았고, 한 번 나가보겠노라고 답했다.

그래서 심야 아르바이트는 3일로 끝났다.

며칠 후 보험사로 나가서 면접(나름 격식을 갖추려는 이벤트?)을 보고 합격(아무나 받지 않으니 합격시켜 주면 고마워하고 열심히 다니라는 보험사의 전략?)을 했다. 

그렇게 이번에는 보험사 영업직원(우리가 알고 있는 설계사) 교육을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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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간의 시선을 이겨내면 성공한다지만 모두가 그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포기하지 않으면 끝내 성공한다지만 모두가 그렇지는 않다.

그렇다고 성공을 개인의 책임으로만 맡길 수는 없다.

노력하면 누구나 가능하다며 성공의 책임을 전적으로 개인의 노력에만 맡기는 건 지나치다. 

타고난 재능, 성향, 판단력 그리고 결코 선택하지 못하는 부모의 영향... 

개인이 책임질 수 없는 성공의 요소들이 성공하지 못하는 사람들 만큼이나 많다.

그렇다고 타인이나 사회에게 핑계 댈 수도 없다.

그런다고 받아 줄 리 없기 때문이다.

성공이 무엇으로 규정되든, 그 길을 모두에게 알려준다 해도 누구나 택하지는 않는다.

성공한 모든 이들의 길은 복제될 수 없는 각자의 고유하고 유일한 길이다.

누군가만 가는 길이다.

누군가가 누군지는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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