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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이언 May 21. 2020

퇴직 후 이모저모 - 3

어느 아침

눈 뜨자마자 거실 유리창의 블라인드를 올리는 것부터 하루를 시작한다.

며칠은 날이 흐리고 미세먼지가 나쁨 수준이더니 여름 초입에 들어선 오늘은 가을 하늘처럼 파랗다.

가끔 휴대폰에서 미세먼지 좋음이라는 표지를 볼 때면 '미세먼지가 좋다는 게 맞는 말인가? 미세먼지는 늘 나빠야 하는 거 아냐'라며 대상도 없는 괜한 시비를 건다.

누구에게나, 어디에나 차별 없이 비추는 아침 햇살은 언제나 기분을 들뜨게 하고 활기를 불러일으켜준다. 

2층 거실에서 바라보는 아파트 정원의 모든 움직임 그러하다.

겨우내 황량하기 그지없던 나뭇가지에 어느샌가 움이 터 오르더니 작은 꽃이 피어난다.

봄이 시작되나 보다 라는 생각이 들면 어느샌가 나무 전체를, 정원 전체를, 세상 모두를 덮어 버린다.

그러다 어디선가의 바람에 작은 꽃잎이 화르르 떨어지면 그 아까움에 나도 모르게 가슴이 움츠러들며  두보의 '곡강 이수'가 생각난다.

'꽃잎 하나 떨어져도 봄빛이 줄거늘, 수만 꽃잎 흩날리니 슬픔 어이 견디리...'

그렇게 바람에, 비에 세상을 한가득 덮고 있는 꽃잎이 지는 아쉬움의 자리엔 맑고 여린 연두색의 들이 가지에서 살그머니 고개를 내민다.

내가 이미 알고 있는 것들, 또는 알지 못하는 움직임과 스러짐 들도 모두 태양허락하는 것이다.

래서 밤새 식고 쪼그라든 모두의 가슴  아침 햇살이 따뜻하게 데워 주고 부풀려 주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그랬다.

그런데 그 날 이후부터는 맑든 흐리든 상관없이 우울하고 가슴이 답답하다.

모든 에너지의 원천인 태양이 날 비추고 있음에도 식은 가슴이, 쪼그라든 마음이 채워지지 않는다.

외려 화창한 날이 흐린 날보다 더 울적다.

밝은 날이면 기분이 좋았던 예전과 그렇지 못한 지금이 대비되는 탓이다.

좋은 걸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된 지금의 상황이 싫은 거다.

사실 세상에 한결같은 것들이 어디 있을까.

긍정적이고 밝은 사람이라고 매사 의욕적일 수 없고, 한결같이 헤헤 거릴 수 없다.

태생이 우울하다 해서 새털같이 많은 날과 매 시간을 질질 짜며 보낼 리도 없다. 설령 시쳇말로 '현타'가 와서 바로 원래의 우울 모드로 돌아가더라도 말이다.

그런데 그날 이후부터 지금까지는 마음껏 웃지 못했다.

가족의 눈치를 보며 헛웃음을 지은 적은 있었지만 옥죈 상태의 가슴으로 웃은 거라 통증은 더 컸다.


순수한 자유의지든 교묘하게 유도된 자유든, 퇴직한 이후의 몇 개월은 후회와 번민으로 가득 찬 시간이었다.

신문에는 정년 연장을 검토할 시기가 됐다는 기사들이 퇴직자들의 궁핍한 삶을 조명하는 기사와 함께 연일 올라온다.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새로운 뉴스였다는 듯이 내 눈을, 가슴을 자극했다.

내가 선택한 퇴직이 잘한 결정이라는, 아니 적어도 그다지 나쁘지 않은 거라는 시그널은 어디에도 없었다.

하루 종일 집에 있으니 심심하다며 만나자는 퇴직자들의 연락도 이 핑계 저 핑계로 거절했다.

회사에 남아있는 후배들의 안부 전화 역시 받기 힘들었다.

아무렇지 않은 듯 감추고 숨기던 퇴직의 상처를 더 키울 것 같았고 퇴직자들 덕분에 재무 상황이 좋아져서 고맙다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아서다.

 

어떤 결정이든 후회와 미련을 남긴다.

무엇을 먹을까에서부터 어느 집을 살까 등 크고 작은 결정은 대개가 다 그렇다.

미리 경험하지 못하는 미래의 상황에 대한 냉정한 검토와 분석 없이 처음과 똑같은 고민만 반복하는 건 자학이거나 자신이 진즉에 선택하고픈 감정적 결정을 지지하는 이론 만들어내기에 다름 아니다.

어쩌면 과대 포장된 내 허상을 믿고 더 나은 무언가를 만들어 낼 자신감을 확인하고자 했던 걸지도 모른다.

그래서 특출 나지 않았던 직장생활을 한 방에 보상받으려는 욕심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다양한 요소를 기반으로 판단하지 못하고 그저 보상금의 크기를 계산기로만 두드려 보았던 거다.


그랬기에 선택 후 후회와 자책이 이리 큰 거다.

현명함과는 거리가 먼 어설픈 고민으로 시간만 끈 퇴직 결정이었다.

레버리지로 활용할 방법을 찾지 않은 채 10분 만에 은행 부채 변제한 퇴직 보상금의 처리 또한 그랬다.

만 원짜리 물건 하나 살 때도 온갖 사이트 다 뒤져가며 가성비 따진답시고 홍보에 불과한 사용 후기 꼼꼼하게 읽어 본 내가, 그래도 끝내 사지 못하고 장바구니에만 담아놓던 내가 그 거액을 10분 만에 처리했다.

뭔가에 홀렸다는 게 정확한 표현이었다.

굳이 표현하자면 모으는데 수십 년, 정리에 10분이었다.

(며칠 지나 알게 됐는데 채무를 완전히 변제하고 나니까 은행의 송금 수수료가 500원 붙었다. 이제 주고받을 거래 끝났으니까 별 볼 일 없어진 거다.  수시로 친절한 안내 문자를 보내 불편사항이 없는지 물어보던 주거래 은행이었 그간 지불한 대출 이자만도 수천 만원이었는데. 아, 이 쌈박한 자본주의란...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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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한 결정 그 자체로 판단되는 게 아니라 결정 이후의 선택과 행동 그리고 그에 의한 결과에 의해 결정된다.

답이 미리 정해진 문제는 시험지 상에서나 가능한 거지 실제 우리네 삶은 그렇지 않다.

어느 쪽이든 선택하고 나면 그 선택이 정답이 되도록 만들어 나가는 게 맞고 그럴 수밖에 없다.

굳이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동시에 두 길을 가 볼 수는 없는 거다.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그때를 돌이켜 본다.

거의 항상.

'그때 다른 선택을 했다면...?'

그래서 아직 그 자리에 있었다면...

역시 반복되는 타성화된 업무의  권태로움에 몸을 비비 꼬았을 테고,

상사의 성과 독촉은 변함없이 이어졌을 테고,

밑의 직원들은 여전히 나처럼 뺀질이 었을 테고,

꼴 보기 싫은 그놈의 얼굴은 매일같이 웃으며 맞이했을 테고,

내 기대보다 낮은 성과급에 담배는 다시 입에 물렸을 거다.

이제서야 알게 된 직장과 일, 소속감의 소중함은 모른 채 '일이 힘드네 , 회사가 거지 같네, 누가 진상이네...' 하며 혼자 회사 일 다하는 듯 여전히 남 들으라고 투덜거리고 있을 거다.

'그때 퇴직해서 목돈 받았어야 하는 건데...'라며 건방을 떨고 있을 거다.


그래서 인생은 거꾸로 살아야 한다. 지금 이 기억을 가진 채...

이 기억 없이 다시 산다면 니체의 '영원회귀'처럼 징그럽게 반복할 이 짓이 싫다.


"누가 그러는데 최고의 재테크는 직장에 오래 다니는 거래."

농담처럼 던지는 아내의 말이 꽤나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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